| ▲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1년 4월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시 부동산정책 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오세훈표 서울시정 가동
오세훈은 서울시장이 취임한 뒤 곧바로 구상했던 시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꺼내든 카드는 ‘상생방역’이다.
오세훈은 2021년 4월13일 국무회의에 참석해 "코로나19 간이진단키트를 도입해 야간 이용자가 많은 노래연습장 등에 시범도입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영업을 보장하자"고 건의했다.
앞서 오세훈은 정부의 방역과 차별화된 서울형 거리두기 매뉴얼을 독자적으로 내놓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하지만 간이진단키트의 검사 정확도가 50% 미만이라는 점과 유흥주점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오세훈표 방역은 벽에 부닥쳤다.
재건축, 재개벌규제를 완화하는 부동산정책도 준비하고 있다.
오세훈은 선거운동 당시 "취임 뒤 1주일 안에 규제 완화에 나서겠다"고 밝혔으나 서울 압구정동과 목동을 중심으로 아파트 호가가 수억 원씩 한꺼번에 오르면서 부동산시장 불안을 부채질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전부터 주장했던 안심소득정책도 구체화하고 있다. 안심소득은 선별적 복지정책으로 중위소득 100%(4인 기준 연소득 5850만 원, 월소득 487만 원)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기준선 이하 소득분의 50%를 차등 지원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소득 4000만원인 4인 가구에는 925만 원(기준 소득 부족분 1850만 원의 절반)을 지원해준다.
△4‧7재보선에서 서울시장 당선
오세훈은 2021년 4월7일 열린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한 뒤 당선돼 10년 만에 서울시장에 복귀했다.
사실 2020년 말까지 오세훈의 서울시장 도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많지는 않았다.
여야 대결구도에서 민주당 후보의 지지도가 만만치 않았던 데다 야권에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가장 높은 지지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의힘 안에서도 오세훈은 나경원 예비후보에게 뒤처지는 분위기였다.
오세훈은 서울시장에 출마하기로 하면서도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국민의힘 입당을 전제로 불출마하겠다는 다소 이상한 제안을 하면서 당 안팎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조선족 비하’ 등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당내 경선에서 나경원 후보를 꺾은 뒤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 안철수 후보마저 이기며 연거푸 이변을 연출했다. 박영선 민주당 후보와 최종 본선에서는 거센 정권 심판론에 힘입어 큰 표 차이로 승리했다.
| ▲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가 2021년 4월7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개표상황실에서 방송3사(KBS,MBC,SBS) 공동출구조사 결과 발표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를 앞서는 걸로 예측되자 김종인 비대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 등과 손을 맞잡고 함께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10년의 정치 공백
오세훈은 2011년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 변호사로 돌아갔다. 국내외 대학을 오가며 공부와 연구활동도 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을 통해 페루 리마와 르완다 키갈리에 파견돼 봉사활동도 했고 이 때 경험을 책으로 써 내기도 했다.
정계 복귀도 꾸준히 시도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는데 성사되지는 않았다.
2016년 20대 총선 때 새누리당 서울 종로구 후보로 출마했다. 이 때 당내 경선과 본선에서 전현직 종로구 국회의원들과 겨루게 됐다.
새누리당 경선에서는 18대 총선 때 종로에서 당선된 박진 의원과 겨뤄 이겼지만 결국 현직 의원이었던 정세균 국무총리에게는 패배해 정계 복귀에 실패했다. 애초 오세훈은 정 총리보다 훨씬 앞서는 지지율을 보였으나 선거 결과 39.72%로 저조한 득표율로 정 총리(52.60%)에게 적지 않은 표 차이이로 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 이후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에 입당하기도 했지만 바른정당과 국민의당 통합을 앞두고 바른정당을 탈당했다.
한동안 당적을 지니지 않고 정치권과 거리를 두다가 2018년 11월 자유한국당에 입당했다.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출마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던 황교안 대표에게 밀려 2위에 머물렀다.
2020년 4월 치러진 제 21대 총선에서는 험지로 꼽히는 서울 광진구을에 출마했지만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정치신인 고민정 의원에게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번번이 정치 도전에 실패했지만 보수야권 내 인물난이 해소되지 않은 까닭에 줄곧 대선주자로 꼽혔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사퇴
오세훈은 무상급식 전면 추진에 반대해 이를 주민투표에 부치고 투표 결과에 시장직을 걸었다가 결국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오세훈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 때 야당인 민주당이 시의회 다수를 차지했다.
지방선거 때도 쟁점이 됐던 무상급식정책을 두고 민주당 다수의 서울시의회와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등은 전면 무상급식을 주장했다.
반면 오세훈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혜택을 보는 게 오히려 비합리적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무상급식 전면 추진에 반대했다. 점진적으로 무상급식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
하지만 시의회는 민주당 단독으로 무상급식조례안을 처리했고 오세훈은 조례안 공포를 거부했다. 결국 시의회 의장 직권으로 무상급식조례안이 공포됐는데 이에 따라 오세훈은 법원에 무효소송을 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오세훈은 무상급식과 관련한 서울 시민들의 의사를 묻겠다면서 주민투표를 시의회에 제안했고 우여곡절 끝에 주민투표가 이뤄졌다.
오세훈은 2011년 8월21일 기자회견을 열고 “아무리 험난해도 이번 주민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복지 방향을 정립하지 않으면 우리 서울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다”며 주민투표에 실패하면 시장직에서 사퇴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투표율이 25.7%로 저조해 개표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무상급식 투표안은 부결됐다.
오세훈은 자기가 한 말대로 시장직에서 물러났고 그 이후 10년 동안 서울시장은 진보진영이 차지했다.
| ▲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왼쪽)와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가 2021년 3월16일 서울 영등포구 더플러스 스튜디오에서 TV토론회를 시작하기 전에 함께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2006~2011년 서울시장 활동
오세훈은 2006년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서울시장에 당선돼 서울시정을 이끌었다.
다만 두 번째 시장에 당선된 뒤 1년 만에 중도사퇴한 탓에 두 차례 당선에도 불구하고 임기가 5년에 그쳤다.
오세훈은 국회의원에서 물러난 뒤 변호사로 돌아가 법무법인 지성에서 대표변호사를 맡았다.
그러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후보로 거명됐지만 출마 의사를 밝히진 않았다.
그런데 당시 열린우리당에서 노무현 정부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 후보가 출마하기로 하자 강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도를 보이게 됐고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대중적 인기가 있었던 오세훈의 영입에 나섰다.
오세훈은 서울시장에 도전하기로 한 뒤 당내 경선을 통과해 강금실 후보도 꺾으며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오세훈의 첫 서울시장 임기의 열쇠말은 ‘창의 시정’과 ‘디자인 서울’이었다.
공무원 조직에 만연한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주의, 보신주의 등을 혁파하고 시정에 창의성을 부여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세계적 도시인 서울에 디자인적 요소를 더하고자 했다.
창의시정 차원에서 공무원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 ‘상상뱅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상상뱅크를 통해 아이디어가 실제 시정에 반영되는 결과들도 나왔다.
공무원뿐 아니라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천만상상 오아시스’를 도입해 시민 제안도 받았다. 서울시는 천만상상 오아시스로 유엔 공공행정상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공무원들의 업무능력 제고를 위해 ‘현장시정추진단’을 만들어 근무태도가 불량하거나 업무능력이 떨어지는 직원을 단순 현장업무에 투입하기도 했다. 이는 공무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디자인 서울은 창의적 디자인을 통해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자는 취지로 추진됐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세빛섬 등이 그 일환으로 건설됐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시작해 한강공원 주변을 꾸미는 작업도 시행했다.
이는 서울시가 2010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디자인 창의도시’에 지정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오세훈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참여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 민주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사상 처음으로 재선 서울시장이 되며 대선주자 반열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두 번째 임기는 순탄치 않았다.
2011년 7월 서울에 폭우가 내려 큰 피해를 입었는데 오세훈이 시장이 된 뒤 추진했던 디자인 서울 사업이 수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디자인에 공을 들이느라 배수에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세훈 취임 뒤 수해방지 예산도 줄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선주자로까지 꼽혔던 오세훈이 10년의 야인생활을 해야 했던 원인을 제공한 ‘무상급식 논란’도 이 때 불거졌다.
| ▲ 오세훈 새누리당 국회의원 후보가 2016년 3월9일 주민과 악수하고 있다. <오세훈 페이스북> |
△국회의원 활동
오세훈은 2000년 16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영입을 받았다. 서울 강남구을 선거구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4년 동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자금법을 발의했고 이 법이 통과되며 정치자금 후원 상한액이 500만 원으로 정해졌다.
오세훈은 초선 의원으로서 소장개혁파 의원들과 함께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는 남경필, 정병국, 원희룡 의원 등 젊은 의원들도 함께 했는데 오세훈은 2001년에 이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오세훈은 제왕적 총재제 폐지를 주장하는 등 개혁적 목소리를 냈다.
2004년 제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과 한나라당 공천혁명의 밑거름이 되려 한다며 불출마하겠다고 했고 말한대로 출마하지 않았다.
△변호사와 방송 진행자
오세훈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리게 됐고 방송 활동을 하며 인지도를 더 높였다.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8년 육군에 입대해 보안사령부 공보정훈장교로 복무해 중위 제대했다.
1991년에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일조권과 관련해 인천의 한 아파트 주민집단소송 사건을 맡게 됐다.
건설사가 아파트 간격을 지나치게 가깝게 하여 햇볕이 들지 않아 고통 받던 주민들이 공동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던 사건이다.
이전까지 일조권과 관련한 법적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을 뿐더러 당시 헌법에 명시된 환경권에 관한 판례도 없었다.
오세훈은 2년6개월에 걸친 법정 다툼을 이어간 끝에 대형건설사를 상대로 13억 원의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환경운동 쪽에 가담하기도 했고 1992년 환경운동연합 시민상담실장을 맡아 무료상담을 하기도 했다.
유명세도 탔다.
방송 출연 기회도 얻게 돼 MBC ‘오변호사 배변호사’에서 배금자 변호사와 함께 방송 진행을 맡았다. 이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는 등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됐다.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경원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했고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겸임교수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