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국회’ 내세우면서도 야당 정치공세에 적극 대응
김태년은 더불어민주당의 신임 원내대표가 된 뒤 협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원구성 협상이나 정치적 논란과 관련 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원구성을 놓고는 예산결산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모두 여당이 맡아야 하며 미래통합당이 반대하면 국회법 대로 표결처리하겠다며 미래통합당을 압박하고 있다.
김태년은 한명숙 전 총리 정치자금법 위반사건 관련과 관련해 2020년 5월14일 고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비망록 공개로 진상조사 문제가 불거지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김태년은 2020년 5월20일 “법무부와 검찰, 법원은 명예를 걸고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일에 즉시 착수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등 진상조사 요구를 이어갔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과 정의기억연대 관련 논란에서도 “기부금 논란으로 지난 30년 동안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해온 정의연 활동이 부정돼선 안 된다”라고 발언하는 등 윤 당선인을 엄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 ▲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가 2020년 5월28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오른쪽)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두 차례 원내대표 도전 끝에 177석 거대 여당 키 잡아
김태년은 2019년에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 도전했다 실패한 뒤 2020년에 다시 도전해 당선됐다.
2020년 5월7일 치러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선거는 김태년을 비롯해 3선 전해철 의원, 4선 정성호 의원 3파전으로 치러졌다.
177석의 거대 여당의 원내사령탑을 뽑는 선거인 만큼 치열한 경쟁이 예상됐다.
하지만 김태년은 1차 투표에서 163표 가운데 과반인 82표를 얻어 결선 투표 없이 바로 당선을 확정지었다.
김태년은 당선인사에서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제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이 시기에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를 맡게돼 어깨가 매우 무겁다”며 “우리 의원들의 힘과 지혜를 모아 경제위기를 극복해내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 추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태도도 보였다.
김태년은 “통합의 리더십으로 당을 하나로 모으고 당정청의 역량을 위기 극복에 집중하겠다”며 “코로나 경제위기 극복과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제 모든 힘을 쏟아 붓겠다”라고 말했다.
김태년은 2019년 원내대표 선거에서는 이인영 전 원내대표, 노웅래 의원과 경쟁했다.
1차 투표에서 125표 가운데 이인영 전 원내대표가 54표, 김태년이 37표, 노웅래 의원이 34표를 얻어 이인영 의원과 김태년의 결선 투표가 결정됐다.
결선투표에서는 이인영 전 원내대표가 76표, 김태년이 49표를 얻었다.
△국회 복귀 뒤 역량 펼치며 문재인 정부 정책 방향 잡아
김태년은 19대 총선에서 당선돼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20대 총선까지 승리해 3선 의원이 됐다.
19대, 20대 국회에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 등을 맡아 ‘직업이 간사’라는 말까지 들었다.
여야 쟁점사안이었던 어린이집 누리과정 국고지원을 비롯해 20대 총선 선거구획정 협상, 온라인 입당 허용, 안심번호 여론조사 도입 등 다양한 현안에서 여야 협상을 이끌었다.
정책역량을 인정받아 2017년 5월부터 2019년 1월까지는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2018년 8월에 민주당의 당대표가 추미애 법무부장관에서 이해찬 대표로 바뀌었음에도 계속 정책위 의장 자리를 지킬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주요 정책과제 선정을 주도했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은 2020년 5월15일 김태년이 원내대표에 당선된 뒤 문재인 대통령의 축하를 전하는 자리에서 “우리 정부의 3년 동안 국정과제를 직접 설계하신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캠프 통해 정치 입문, 끝까지 열린우리당 지켜
김태년은 전남 순천에서 구두수선공인 아버지와 시장 좌판에서 생선을 파는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꿈을 꾸며 기자를 희망했었으나 경희대를 다니며 총학생회장을 맡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활동하며 사회운동가로 진로를 바꿨다.
1987년 6월 항쟁에서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1990년 경희대를 졸업한 뒤 경기도 성남에 머물며 시민사회운동을 벌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에 합류하며 민주당과 인연을 맺었다.
2004년 총선에서 경기도 성남 수정구에 출마해 만39세로 당선돼 17대 총선 최연소 당선자가 됐다.
2004년 총선은 같은 해 3월 국회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데 따른 탄핵반대 여론의 바람을 타고 열린우리당이 단독 과반인 152석을 차지한 선거다.
하지만 김태년이 초선의원이었던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은 내분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다 2005년 재보궐선거, 2006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했다.
2007년에는 의원들이 탈당이 이어진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당됐다. 김태년은 당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과 함께 열린우리당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의원 가운데 한 명이다.
김태년은 18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신영수 후보에게 18대 총선 최소 표차인 129표 차이로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