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영민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후임 실장과 임종석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이 2019년 1월8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
노영민은 청와대가 김기현 전 울산시장과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관해 '하명수사'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청와대는 2018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기현 울산시장 측근의 비리에 관해 울산 경찰에 하명수사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청와대가 하명지시 문건을 보내 강제수사한 의혹이 있다는 입장을 내놨고 이에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경찰에 지시한 것이 아니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영민은 김기현 전 울산시장 감찰과 경찰수사 압박 의혹을 부인하며 적극 해명했다.
노영민은 2019년 11월29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기현씨를 감찰한 적이 없다"며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이 울산 현장에 간 것은 '고래고기'사건으로 검찰과 경찰이 다투는 상황에서 불협화음을 해소하기 위해 내려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압수수색 전에 ‘이첩된 첩보와 관련해 자료를 수집 중’이라는 보고를 한번 받았고 압수수색은 실행 20분 전에 보고받았다"며 "통상적으로 이뤄지는 업무절차에 따른 것이며 수사를 압박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노영민은 청와대의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무마 의혹에 관해서도 해명했다.
노영민은 2019년 11월29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시 수사권이 없는 민정수석실에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조사한 이후에 일정 정도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인사조치한 수준에서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부실인사 논란
문재인 정부는 2019년 인사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노영민은 인사추천위원장인 만큼 부실인사 논란의 가운데 놓이며 비판을 받았다.
노영민은 2019년 4월4일 부동산 투기와 해외 부실학회 참석 의혹 등으로 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와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낙마에 관해 공식 사과했다.
노영민은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인사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점에 관해 인사추천위원장으로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인사추천에 더 신중을 기하고 검증을 더욱 엄격히 하겠다”고 말했다.
노영민은 조국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2011년 민주당 수석원내부대표 시절 권재진 당시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일을 놓고 부정적 태도를 보여온 점이 회자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9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9월9일 딸 특혜 장학금 논란과 사모펀드 등 여러 의혹에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을 두고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찬반 집회가 이어졌고 문재인 대통력 국정지지도는 취임 후 최저치를 보였다.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은 10월8일 검찰개혁 방안을 발표하고 10월14일 사의를 발표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10월16일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으로 대통령을 잘못 보좌한 노영민 비서실장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영민은 11월1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인사에 관해 결론적으로 실패한 인사라고 인정했다.
△국회와 경제계를 향한 소통 강화
노영민은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과 야당 국회의원 사이에 소통 창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9년 1월11일 여야 대표를 만나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듣고 문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노영민은 “정부가 국회와의 소통을 중시하고 당과의 소통을 충실히 하지 않으면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민생경제에 있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노영민은 '원조 친문(친문재인)' 인사로 꼽히는 동시에 민주평화국민연대를 주도하는 등 더불어민주당 내에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과 공관에서 만찬을 하는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상임위별로 수시로 만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영민은 사업가 출신에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장을 거쳐 온 이력을 활용해 문재인 대통령과 경제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영민 비서실장을 임명하며 경제계 인사를 만나 소통에 힘써 줄 것을 지시했다.
노영민은 2019년 1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9 기업인과의 대화’ 행사에 참석해 기업인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며 취임 후 첫 경제계 소통을 시작했다.
노영민은 1월16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티타임에서 “(2019 기업인과의 대화) 현장과 사전질문을 통해 나왔던 질문 하나하나에 다 답을 주겠다”며 “기업인들의 건의사항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노영민은 1월24일 중소기업중앙회를 방문해 중소기업인 40여 명과 비공개 간담회를 하고 업계의 현안을 챙겼다.
노영민은 4월30일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한데 이어 5월22일 충북 오송에서 열린 바이오헬스산업 혁신전략 발표 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경제계와의 소통에 적극적 태도를 보였다.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징용 배상 판결을 내린 문제를 놓고 한국 정부와 부딪쳐 오다가 2019년 7월1일 수출규제를 강화했다.
노영민은 2019년 7월4일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 재계 총수들의 만찬에 참석해 일본 수출규제에 관한 조언 등을 구했다.
△청와대 안살림 기강 확립
노영민은 후반기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가 성과 내기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청와대 내부 단속부터 철저히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노영민은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 운영과 정국 구상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며 검토해야 하는 청와대의 대면보고를 줄였다. 이에 반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각 부처 장관 등의 내각 보고는 확대했다.
노영민은 취임 초부터 비서관실마다 걸려있는 '춘풍추상(남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게 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을 언급하며 공직기강 확립을 주문했다.
2019년 설 연휴를 앞두고는 1층 검색대에서 퇴근하는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대상으로 불시 가방 검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가방 검사에선 외부인들로부터의 선물수수, 공문서 무단유출 여부를 집중적으로 챙겼다.
노영민은 3월 정부가 미세먼지 저감대책의 일환으로 시행한 청와대의 개인차량 이용 금지 조치에 도보로 출근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5월 집권 3년차에 접어들었다. 노영민은 5월13일 청와대 직원들에게 초심과 열정을 지켜나가고 성과, 소통과 경청, 절제와 규율의 청와대가 되자는 메시지를 보내며 문재인 정권 3년차의 각오를 다졌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 임명
노영민은 문재인 정부의 집권 초기부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 후보로 거명돼 왔다. 결국 임종석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의 뒤를 이어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맡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1월8일 노영민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으로 임명했다. 노영민은 1월9일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임종석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은 후임자인 노영민을 직접 소개하면서 "각계 현장과 풍부한 네트워크를 보유했고 소통능력도 강점으로 갖췄다"며 "기업과 민생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최고의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노영민은 임명 소감으로 “나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참 두렵지만 경청을 통해 부족함을 메우려 한다”며 “어떤 주제든, 누구든, 정책이든 가리지 않고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 ▲ 노영민 주중대사(오른쪽)가 2018년 12월10일 서울 청와대에서 열린 '2018년도 재외공관장 만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
△주중대사 활동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중국대사를 맡아 중국과 관계 개선 노력을 기울였다.
2017년 8월 문재인 정부의 첫 주중 한국대사로 내정됐다. 2017년 9월 대사 자리를 수행하기 위해 민주당에서 탈당한 뒤 중국대사로 부임했다.
중국대사로 임명된 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에 따른 갈등 완화에 힘썼다. 한국-중국 통화스와프의 연장에 이어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도 힘을 보탰다.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 기업의 담합 조사를 완화할 것을 요청하는 등 기업친화적 행보도 보였다. 삼성전자가 중국 시안에 세운 반도체공장 기공식에도 참석했다.
중국사와 한시, 바둑 등을 잘 알아 중국 인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내부의 인적 네트워크도 상당히 갖춘 것으로 전해졌다.
노영민은 2017년 9월29일 외교부 기자간담회에서 이마트와 롯데그룹의 중국 철수가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과 관련되지 않았다고 말해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2017년 12월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임장 제정식 때 방명록에다 황하가 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한다는 의미의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글을 적었는데 이 말이 조선 시대 명나라 만력제를 기리는 사당 이름으로 사용되는 등 중국을 향한 충성을 의미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노영민은 12월19일 SBS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사대주의라면서 모든 일이 본래의 뜻대로 된다는 사필귀정의 뜻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사드 갈등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다시 잘 풀릴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문재인과 인연
노영민은 정치권에서 친문재인계 핵심인사로 분류된다.
2003년 대통령정책실 신행정수도건설 추진기획단 자문위원으로 일하던 시절 문재인과 처음 알게 됐다. 다만 그때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계파 모임인 민주평화국민연대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친김근태’ 인사로 분류됐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2012년 민주평화국민연대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는 과정에서 노영민이 후보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친문재인’으로 떠오르게 됐다.
노영민은 문재인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선거캠프에 참여한 의원 10여 명과 함께 ‘문지기(문재인을 지키는 사람)’ 모임을 만들었다. 그 이후 최측근 인사로 활동하면서 ‘원조 친문’ 또는 '문재인의 스핀닥터(정치전략가)'로 꼽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시절 노영민은 당직 인선을 총괄했다. 이때 문재인 대표의 측근 인사들을 일컫는 ‘6인회’ 구성원으로도 꼽혔다. 다른 5명은 전해철, 박남춘, 홍영표, 김태년, 윤호중 의원이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는 문재인 선거캠프의 조직본부장을 맡아 선거조직을 총괄하면서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당시 문재인 후보의 지지 모임인 ‘더불어포럼’ 출범을 주도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전현직 의원 모임인 ‘달개비’에도 참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경선에 출마했을 때 한 라디오 토론회에서 정치적 고민을 누구와 상의하는지 질문받자 “노영민 의원과 상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계 입문에서 3선 국회의원까지
노영민은 1997년 정권교체 민주개혁 충북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을 거쳐 2000년 새천년민주당 중앙당 부대변인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선거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선대위 충북본부장을 맡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충북 청주시 흥덕구을 선거구에 출마해 52.44%의 득표율로 당선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통합민주당,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37.46%, 52.96%의 득표율로 연이어 당선했다.
민주당에서 원내대변인과 원내수석부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중진 정치인의 반열에 올랐다. 3선 의원 시절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경제 이슈에 밝은 의원으로도 꼽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의원들 가운데 이례적으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에 반대하는 등 시장에 비교적 가까운 행보를 보여줬다.
반도체와 IT산업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08년 ‘반도체의 날’ 제정을 제안했고 반도체에 관련된 여러 법안도 발의했다. 2008년 시스템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미래산업 지원을 논의하는 국회신성장산업포럼 설립에 참여해 2015년까지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초선의원 시절 조경태 열린우리당 의원과 ‘한미 의원 친선모임’을 만드는 등 외교관계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2015년에는 이명박 정부의 해외 자원 개발 문제를 조사했던 ‘국회 해외자원개발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노동운동가에서 사업가 거쳐 시민운동가 되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다니던 도중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77년 구국선언서 사건에 연관돼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된 뒤 2년 동안 복역했다.
1979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돼 사면복권된 뒤 1980년 연세대 복학생협의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해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배되면서 제적됐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 오산, 청주 등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이때 생계를 위해 전기공으로 일하면서 전기공사 2급 자격증을 따 경력을 쌓았다. 청주에서 전기기술자노조를 출범하기도 했다.
1986년 전기공 경험을 살려 금강전기를 설립하면서 중소기업인으로 활동했다. 그 뒤 청주환경운동연합 이사, 아동학대방지센터 자문위원, 충북자치21 발행인 등 시민운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