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연구원장 맡아 민주당의 총선 승리 특명
2019년 5월14일 민주연구원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복귀해 2020년 총선에 대비하고 있다. 양정철도 취임 직전인 2019년 5월13일 “민주연구원은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라고 말했다.
하반기에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고 알려졌다. 자유한국당이 지지층 결집에 힘쓰는 점을 고려해 중도층의 지지를 모을 방안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철은 취임 직후 출근길에서 기자들에게 “총선 승리의 대의 앞에서 국민 앞에 겸허하게 ‘원팀’이 되겠다”며 “민주당 안에 ‘친문재인’과 ‘비문재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천 물갈이’를 이끌 수 있다는 전망에 양정철은 “수혈할 때 몸안의 피를 빼내고 하지는 않는다”며 “헌혈을 하면 새 피와 기존 피가 어우러진다”고 반박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2019년 5월14일 기자간담회에서 “민주연구원장은 연구원장이고 당이 선거를 치른다”고 선을 그었다.
민주연구원장으로 취임한 뒤 정치행보를 폭넓게 보여주고 있다.
2019년 5월16일 정책연구소 수장으로는 이례적으로 문희상 국회의장을 단독으로 만났다. 5월1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정계복귀를 권유해 화제에 올랐다.
다만 양정철이 역할과 비교해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다는 평가도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철이 2020년 총선에 직접 출마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양정철은 “자기 정치를 하러 오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왼쪽)이 2019년 5월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 토크콘서트에서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백의종군’ 선언
양정철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이자 ‘실세’로 꼽혔다. 이 때문에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양정철도 정부나 청와대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양정철은 2017년 5월16일 기자들에게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는 제목의 메시지를 남기면서 정계와 거리를 두겠다고 했다. 그 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작은형의 집에서 머물다가 일본 도쿄로 거처를 옮겨 2년여를 보냈다. 2018년 4월부터는 도쿄 게이오대학교 법학과 방문교수로 일했다.
양정철은 2018년 1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정계와 거리를 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의 ‘친노무현’ 프레임을 바꾸기 위해 정계를 떠났다고 설명했다. 당시 양정철은 “문재인 대통령은 가까운 측근이 적은 편이라 내 동선이나 움직임이 주목을 받고 뭘 해도 기사가 되는 일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2018년 초에 ‘세상을 바꾸는 언어’를 출간한 뒤 국내와 미국에서 여러 차례 북콘서트를 여는 행보를 보였다. 이때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북콘서트에 참석하면서 양정철의 정계복귀 가능성이 계속 제기됐다.
2019년 3월 일시 귀국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는 등 정계복귀 의사를 타진했다. 결국 민주당에서 제안한 민구연구원장 자리를 수락하면서 정계에 돌아오게 됐다.
△민주당에서 문재인과 함께하다
2012년 총선 출마에 도전했다가 경선에서 탈락한 뒤 문재인 민주당 대표를 보좌하는 데 힘썼다. 특히 인재 영입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 도전했을 당시 새누리당 출신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국민통합위원장으로 끌어들여 주목을 받았다. 이때 양정철이 윤여준 전 장관의 영입에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양정철은 2012년 대선 선거운동을 하던 도중인 2012년 10월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물러났다. 민주당 내부에서 ‘친노무현’ 세력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진 데 따른 조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쓴잔을 마신 뒤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2013년 12월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내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이와 함께 양정철도 정계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대선 당시 ‘친노무현’ 참모진이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던 점을 놓고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양정철 등을 향한 신뢰를 나타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6년 민주당 대표였을 때 보수계 거물인 김종인 전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세웠다. 이때도 양정철이 김종인 전 의원의 영입에 힘쓴 것으로 전해졌다.
양정철은 2016년 총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가 표창원 김병기 조응천 등 ‘문재인 키즈’로 불리는 인사 20여 명을 영입할 때도 실무를 담당했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이 운영하던 가게에 열 차례 넘게 방문하는 등 인재 영입에 공을 들인 끝에 민주당의 2016년 총선 승리에 기여하면서 문재인 대표의 정치적 기반을 굳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6년 6월 더불어민주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 네팔로 떠나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을 때 양정철은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함께 동행했다.
2016년부터 문재인 민주당 대표의 대선 준비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광흥창팀’에 참여했다. 광흥창팀은 문재인 후보의 일정, 정책, 메시지, 조직 등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2017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부실장을 맡아 해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손발을 맞추면서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이 2019년 5월14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
△노무현 서거 전후, 문재인의 정계 입문을 이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퇴임한 뒤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을 때 양정철과 윤태영 전 청와대 비서관을 불렀다. 양정철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 집필 작업을 도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하자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노 전 대통령의 글을 여러 개 올리면서 슬픔과 추모하는 뜻을 나타냈다.
2009년 9월 출범한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당시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였던 문재인 대통령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때 문재인의 정계입문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1년 내놓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을 기획하고 집필을 도왔다. 반향이 커지자 전국 각지를 도는 ‘북콘서트’를 기획해 문 대통령을 설득한 끝에 승낙을 받았다.
이 책과 북콘서트 흥행을 기반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정계에 입문하면서 양정철은 ‘문재인을 호랑이 등에 태운 인물’이자 ‘킹메이커’로 불리게 됐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양정철은 2002년 노무현 새정치민주연합 대선후보의 언론보좌역을 맡으면서 정계에 들어왔다. 언론노보 기자 시절 지인인 유종필 전 민주당 대변인의 요청을 받아 합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으로 들어갔다가 2003년 12월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나이 39세로 최연소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그의 고등학교 선생님인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과 함께 청와대에서 일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8년 퇴임할 때까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5년 동안 일하면서 ‘실세’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매일 새벽 5시에 출근해 언론 보도의 요약과 대응방안 등을 담은 언론분석 보고서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철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2004년 7월에 신행정수도 건설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자 양정철은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비판해 구설수에 올랐다.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서 기자실 통폐합을 뼈대 삼은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의 시행을 주도했다. 이때 언론과 부딪치는 과정에서도 거친 언사를 종종 보여 ‘싸움꾼’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문재인 대통령의 2012년 대선 도전 실패 등을 겪으면서 이전보다 말과 행동이 유화적으로 바뀌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양정철은 2018년 1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가 여론이나 정치권으로부터 과도한 공격과 비판을 받는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강하게 대응했지만 공직자로서 현명한 처신은 아니었다”며 “언론이나 야당 의원에 거친 말과 공격적 언사를 한 일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노보 기자에서 홍보팀으로
시민단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일하다가 1988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의 언론노보(현 미디어오늘) 기자로 자리를 옮겨 1994년까지 일했다.
1990년 군 보안사령부에서 일하던 윤석양 이병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을 포함한 민간인 1300여 명의 사찰 카드를 지닌 채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윤석양은 대학교 선배인 양정철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양정철은 권영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등과 논의한 끝에 윤석양 이병에게 받은 자료를 학교 선배인 이인우 한겨레 기자에게 넘겼다. 그 뒤 윤석양 이병이 기자회견을 열고 한겨레도 관련 사안을 보도하면서 보안사령부가 기무사령부로 간판을 바꾸게 됐다.
양정철은 1994년 나산그룹 홍보실로 자리를 옮겼다. 1995년부터 1997년 동안 한보그룹 홍보실에서 일했다. 이때 정태수 한보그룹 총괄회장의 홍보업무를 맡았던 점 때문에 훗날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을 때 ‘한보 사태’와 관련됐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2001년 스카이라이프 홍보실장을 지냈다. 2002년 회사의 주요 현안사항을 외부에 유출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학생운동가 양정철
서울 우신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읽으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국문학과 진학을 희망했지만 돈을 벌길 바랐던 부모의 뜻을 따라 198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외대에서 외대학보 편집장과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 회장을 역임했다. 민주화운동에도 뛰어들어 1987년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 위원장을 맡았다. ‘학투련(학살원흉 즉각퇴진과 노태우집권분쇄를 위한 학생투쟁연합)’ 부의장도 지냈다. 이 때문에 수배자에 올라 오랫동안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 시위에 참여했다가 1988년 구속돼 1년 동안 복역했다. 양정철은 블로그 ‘양정철닷컴’에 올린 글에서 “경찰 출신으로 보수적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검거됐다는 9시 뉴스를 보다가 TV를 부순 뒤 면회 한 번 오지 않았다”며 “화해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