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희 기자 ssul20@businesspost.co.kr2017-02-22 09: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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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과 과제/평가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어록
생애
▲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
김인호는 전 한국무역협회 회장이다.
194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대학 맥스웰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로 공직에 들어 와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서 물가정책국장, 경제기획국장, 차관보, 대외경제조정실장을 거쳤다. 환경처 차관을 거쳐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철도청장을 역임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이 장관급으로 격상되면서 초대위원장을 맡았다.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금융개혁법을 조율하는 등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을 주도했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경질됐고 외환위기의 책임자로 지목돼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함께 구속기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책적 판단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과 와이즈인포넷 회장, 중소기업연구원장, 소비자정책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경쟁이 꽃피는 경제'(1997년), '시장으로의 귀환'(1999년), '시장원리와 한국의 경제운용'(공저)(2008년), '길을 두고, 왜 길 아닌 데로 가나'(2010년) 등이 있다.
엘리트 관료출신으로 고전음악에도 조예가 매우 깊다. 철저한 시장경제 신봉자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정통 엘리트 경제관료 출신이다.
제28대 한국무역협회장에 내정됐을 때 1997년 말 외환위기 발생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18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와 인연이 깊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초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을 보좌했다. 당시 그의 비서로 일했던 사람이 바로 최 전 부총리이다.
최 전 부총리는 그가 1997년 말 외환위기 책임자 중 한 명으로 몰려 검찰수사와 법원의 재판을 받을 당시 그를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최 전 부총리가 옛 상관인 그를 챙긴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노태우 정부 시절 대외경제조정실장을 맡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남북경협 등의 난제를 무난히 처리했다고 평가받는다. 또 조순 경제부총리를 도와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도입을 추진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이던 금융실명제를 1991년 1월 1일부터 전면 실시한다고 1988년 10월 발표했다. 하지만 1990년 경제 여건 악화로 실시를 무기한 연기했다. 그가 추진했던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정부 첫해인 1993년에 전격 실시됐다.
시장경제 신봉자다. 그는 공정거래위원장 시절에도 집무실에 "경쟁이 꽃피는 시장경제"라는 액자를 걸어놓을 만큼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했다. 현재도 기업 구조조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기업의 법인세 인상을 놓고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재판이 끝난 이후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소'를 만들어 시장경제 이념을 전파하고 다녔다. 경제기획원과 공정거래위원회에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소신을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유지했다.
외환위기 이후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다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등장했다. 그가 박 대통령의 취임사 작성에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과 같이 조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국무역협회는 정부와 민간에서 경제·통상·경쟁·소비자·중소기업 등 다양한 정책을 다뤘던 그의 경륜이 현재 무역업계에 산재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지난해부터 박근혜 정부의 중장기 전략 수립에 깊이 참여한 만큼 정부와 교감을 통해 정책방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66년 제4회 행정고등고시 재경직에 합격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이 됐다.
1989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 되었고 1990년까지 경제기획원 차관보로도 활동했다.
1990년 경제기획원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임명받았다.
1992년 환경처 차관이 됐다.
1993년 한국소비자보호원장으로 근무했다.
1994년 철도청장이 됐다.
1996년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냈다.
1997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근무했다.
1999년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2000년 와이즈인포넷 회장을 역임했다.
2001년 (법무법인 세종 부설) 시장경제연구원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2004년 중소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고 2008년 4월부터 현재까지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0년 정부 소비자정책위원회 공동(민간)위원장을 역임했다.
2014년 10월부터 중장기전략위원회 공동(민간)위원장, 2015년 2월부터 제29대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학술장학재단인 산학협동재단 이사장도 겸임하고 있다.
2016년 4월 한국무역협회 제29대 회장단에 ICT·IoT업계 CEO 5명을 신규 회장단으로 위촉했다.
2017년 11월 한국무역협회 회장에서 물러났다.
◆ 학력
1960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했다.
1973년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맥스웰대학원에서 행정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경제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88년 국방대학원에서 안보과정을 이수했다.
1995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3 Tech CEO과정’을 수료했다.
◆ 가족관계
◆ 상훈
1987년 12월 홍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1993년 12월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상훈
1987년 12월 홍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1993년 12월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어록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안보위기 고조 등 크나큰 대내외 악재 속에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구속이 한국경제에 미치게 될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 이 여파는 한 기업인의 구속과 기업 이미지 훼손에 그치지 않고, 전체 기업인에 대한 우리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확대하고 기업가정신을 크게 후퇴시킬 것이다.” (2017/02/17,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이 결정된 뒤)
“정치권이 기업을 괴롭히는 법률, 전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법률만 만들고 있다. 지금 기업을 비난하는 정치인들은 앞으로 집권했을 때 기업에 손 안 내밀고 정치와 경제를 꾸려갈 수 있느냐.” (2017/02/09, 한국경영자총협회 주최로 열린 전국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2017년은 저성장, 보호무역주의 확산,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불확실성이 심화할 것이다. 경쟁 기업의 변화를 통찰하고 끊임없이 바뀌는 수요자의 선택에 민감하게 적응하는 글로벌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2017/01/01, 2017년 신년사에서)
“예측가능하고 일관성 있는 정책 기조를 유지해달라. 보호무역주 강화 등 대외환경 변화 속에서 이번 사태(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해 주었으면 한다.” (2016/12/10,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경제장관-경제단체 간담회'에서)
“우리 무역은 과거와 같은 고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제는 새로운 성장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 수출 규모의 양적인 확대도 중요하지만 긴 호흡을 가지고 수출의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2016/12/05, 삼성동 코엑스에서 제53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최순실 사태와 같은 문제가 다시 생기지 않게 사고와 제도를 바꿔야 한다. 오히려 (이번 사태로 향후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불안정한 정국을 계속 유지할 경우에는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평화적인 100만명 촛불시위에 외국언론들이 좋은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2016/11/28, ‘제53회 무역의 날’을 앞두고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 대회의실에서 가진 언론사 간담회에서)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가운데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야 한다. 한국은 20세기 과거판과 21세기 미래판이 충돌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한국의 수출경쟁력은 개별적인 무역정책이 아니라 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경제구조를 개선해야 회복될 것이다.” (2016/10/05,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센터에서 열린 ‘2016년 추계 한국무역협회(KITA) 미래무역포럼’에서)
“한미 관계는 단순히 경제관계가 아닌 정치·외교·국방·사회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한 미국의 역사를 고려할 때 경기불황이 ‘뉴노멀’이라는 용어로 정의되는 최근의 경기동반 침체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 내 보호무역으로의 회귀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 (2016/09/22, 미국 워싱턴 D.C.에서 짐 더민트(Jim DeMint) 헤리티지재단 회장과 면담자리에서)
“한진해운 사태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기 전에 시장의 흐름에 따라 선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지 못해 안타깝다. 사태가 확대된 만큼 이제라도 정부와 한진해운의 시의적절한 노력을 기대한다.” (2016/09/07, '한진해운 물류대란 법정 쟁점 긴급 좌담회'에서)
“서울 잠실운동장 일대와 삼성동 코엑스를 잇는 글로벌 마이스(MICE: 기업회의·포상관광·컨벤션·전시회)밸리를 구축해 무역 2조달러 시대를 열 것이다. 과거 수출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친 마이스산업이 서비스를 수출하는 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 과거 수출이 기업들이 해외에 직접 나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외국 손님들이 한국에 와서 물건을 사가고 서비스를 소비하는 ‘인바운드 수출’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2016/09/05,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
“세계 경제 리더로서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을 표방해온 미국이 최근 들어 한·미 FTA에 대한 비판과 보호무역주의 색채를 강화하는 분위기에 대해 한국 기업인들은 우려를 표한다. 미국의 자유무역협정 반대론자들은 본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숫자와 통계를 인용해 자유무역의 의미를 애써 퇴색시키려 하고 있다.” (2016/07/21,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한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통해 힘을 더해 줄 수 있어 기쁘다,” “학생들이 학업에 정진해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을 이끄는 훌륭한 인재로 거듭나길 바란다.” (2016/04/27, 한국무역협회의 학술장한재단 ‘산학협동재단’이 ‘2016년도 장학증서 수여식’을 개최하면서)
“무역 환경의 경우 지난해에 이어 크게 호전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선진국 경기회복에 따른 수입 수요 확대, 한·중 FTA 발효, 무역업계의 신제품 개발 노력 등으로 그나마 올해에는 수출이 다소 증가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기대한다. 다만 최근 이란의 수출 재개 등으로 국제유가가 더 떨어질 소지가 높아 원유 관련 제품(석유제품, 석유화학)의 수출과 에너지 수입 규모가 예상보다 적어질 가능성이 커져 무역 1조 달러 달성을 장담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우리 경제 역시 뚜렷한 회복 흐름을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잠재적 발전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구조 개혁을 하고 기업도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지속적인 혁신을 이뤄나갈 때이다.” (2016/02/01,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우리도 정부가 나서서 한계기업 정리 등 경제 활성화를 위한 갖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국회 논의 지연 등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구조 개혁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룰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2016/02,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올해 무역업계 수출회복을 위해 총력지원할 것.” “한중 FTA를 활용할 때 차이나데스크를 적극 이용해달라.” “최근 무역 대외변수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역업계가 한중 FTA를 적극 활용해 중국 내수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2016/01/26,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활용전략 포럼’에서)
"'총력 수출 지원으로 무역 1조 달러 조기 회복과 경제활력 제고'를 목표로 우리 기업들이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2016/01, 2016년 신년사에서)
“불(不)가측 불확실 불연속으로 규정되는 미래에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 “모든 것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경쟁력은 오로지 경쟁적 구조에서만 나온다’는 명제이다.” (2015/12/17, 기획재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의 제5차 회의에서)
“정부는 경제의 모든 부분을 경쟁적 구조로 바꾸는 노력을 해야한다.” “경쟁력의 확충이 한국경제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과제다.” “경쟁력은 오로지 경쟁적인 구조에서만 나온다.” “우리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경쟁 구조를 유지?발전시키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2015/11/26, ‘KITA 최고경영자 조찬회’에서 ‘불확실성의 글로벌 경제 하에서 한국 경제가 가야할 길’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감히 넘보지 못할 군사력과 경제력을 유지하는 것만이 우리가 북한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2015/10/05, 자매결연부대 모범장병 초청행사에서)
“사정 수사가 정상적 활동을 하는 기업들까지 위축시켜서는 안된다.”, “원론적 차원의 얘기지만 교각살우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2015/03/30,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취임 1개월을 맞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확대되는 대기업 사정 수사와 관련해)
“무역업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글로벌 기업가 정신으로 재무장해야 할 때"라며 "세계 일류의 기업형 국가로 가는 것이 한국의 살길이다.”, “한국경제가 국가의 발전단계에 맞는 시장경제구조를 갖췄는지 회의적이다. 좀 더 성숙한 구조가 되어야 한다.”(2015/02/26,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무역협회 정기총회 중 취임사에서)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위기는 단순한 외환위기로 끝날 수 있었는데 김대중 정부의 잘못된 대응 등으로 경제 전체의 위기로 확산돼 국민들이 겪지 않았어도 됐을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IMF위기의 책임과 관련해서 정치인·관료·금융인·기업인·노동자·농민등 모든 국민이 자유로울 수 없다”
“IMF 환란 주범이 굳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와 같은 특정인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이후 우리나라에 만연된 ‘고성장 신화에 대한 집착’이라고 답하겠다.” (2002/11/26, 서강대 경제대학원 오피니언 리더스 프로그램이 마련한 조찬 강연에서)
“대통령은 집무실 책상에 그대로 앉아 보고를 받을 때도 많았다”, “그 옆 탁상에서 보고할 때도 1∼2분정도 보고하면 시계를 쳐다보는 정도.”, “일국의 대통령이 (중요한) 보고를 그런 식으로 받았다는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는 경우 심한 허탈감에 빠져들까 걱정 된다.”
“아무리 충분히 보고해도 대통령이 문제인식에 한계가 있다면 보고자로서 어찌할 수 없다.” (1999/09/18, 「월간조선」 10월호, 외환위기 사건관련 검찰수사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지식의 한계'에 대해)
◆ 평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정통 엘리트 경제관료 출신이다.
제28대 한국무역협회장에 내정됐을 때 1997년 말 외환위기 발생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18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와 인연이 깊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초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을 보좌했다. 당시 그의 비서로 일했던 사람이 바로 최 전 부총리이다.
최 전 부총리는 그가 1997년 말 외환위기 책임자 중 한 명으로 몰려 검찰수사와 법원의 재판을 받을 당시 그를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최 전 부총리가 옛 상관인 그를 챙긴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노태우 정부 시절 대외경제조정실장을 맡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남북경협 등의 난제를 무난히 처리했다고 평가받는다. 또 조순 경제부총리를 도와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도입을 추진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이던 금융실명제를 1991년 1월 1일부터 전면 실시한다고 1988년 10월 발표했다. 하지만 1990년 경제 여건 악화로 실시를 무기한 연기했다. 그가 추진했던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정부 첫해인 1993년에 전격 실시됐다.
시장경제 신봉자다. 그는 공정거래위원장 시절에도 집무실에 "경쟁이 꽃피는 시장경제"라는 액자를 걸어놓을 만큼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했다. 현재도 기업 구조조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기업의 법인세 인상을 놓고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재판이 끝난 이후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소'를 만들어 시장경제 이념을 전파하고 다녔다. 경제기획원과 공정거래위원회에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소신을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유지했다.
외환위기 이후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다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등장했다. 그가 박 대통령의 취임사 작성에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과 같이 조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국무역협회는 정부와 민간에서 경제·통상·경쟁·소비자·중소기업 등 다양한 정책을 다뤘던 그의 경륜이 현재 무역업계에 산재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지난해부터 박근혜 정부의 중장기 전략 수립에 깊이 참여한 만큼 정부와 교감을 통해 정책방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기타
2001년 KBS교향악단을 지휘한 일로 주목받았다. KBS교향악단 역사상 아마추어 지휘자가 공식 연주회를 지휘하기는 처음이었다.
2001년 2월2일 오후 7시반 KBS홀에서 열린 신년 특별음악회에서 차이코프스키 ‘슬라브 행진곡’을 지휘했다. KBS교향악단은 고전음악의 저변확대와 정기회원의 자부심 고취를 위해 악단 정기회원인 그에게 지휘를 부탁했다고 밝혔다.
당시 “학창시절 장래희망은 지휘자였고 웬만한 고전음악 레퍼토리는 다 머릿속으로 외우고 있다”며 “유학 시절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만 듣다 온 일도 많았다. 이제 일생의 가장 큰 소망 중 하나를 성취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부친 김영환 목사는 바이올린을 잘해 숭실전문학교 동문인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와 함께 바이올린 첼로 이중주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클래식음악에 관심을 쏟았고 70년대 미국 시카고총영사관에 경제담당 영사로 근무할 때 음반 사 모으기가 첫 번째 취미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고위급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음악듣기를 취미로 권하고 싶다”며 “음악이 지닌 균형과 조화를 알게 된다면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나 독선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