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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신종균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노력의 화신, 샐러리맨 신화 [2016년]
김용원 이승용 기자 one@businesspost.co.kr 2016-03-17 10: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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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전과 과제/평가
  • 사건사고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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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신종균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 신종균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신종균은 1956년 1월1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영등포고등학교와 인하공업전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광운대 전자공학과에 편입해 학사학위를 받았다.

중소기업을 다니다 삼성전자에 입사해 연구3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삼성전자에서 유무선전송그룹 그룹장을 맡으며 휴대폰사업에 일생을 바치게 된다. 2000년 휴대폰 사업정보통신총괄 이사보로 승진하며 임원 대열에 올라섰다. 이후 텔레커뮤니케이션총괄 상무로 승진한 뒤 무선사업부 개발2팀장(전무)을 맡았다.

2009년 12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2012년 12월 삼성전자 조직개편에서 디지털미디어&커뮤니케이션(DMC) 부문이 소비자가전(CE)과 IT?모바일(IM)으로 나눠지자 IM부문을 총괄하게 됐다. 권오현 부회장, 윤부근 사장과 함께 삼성전자의 각자대표가 됐다.

갤럭시S5의 재고 문제, 갤럭시S7의 엣지모델 수요예측 실패 등이 겹쳐 애플에 스마트폰 점유율을 내주는 등 고전했다.

2015년 연말인사에서 겸직하던 무선사업부장직을 고동진 사장에게 넘겨줬다.

여러 불확실한 대외환경을 맞아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2017년 10월 31일 부문장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으나 11월2일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2018년 3월 임기가 끝나는 대로 삼성전자 대표이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신종균은 대한민국에서 샐러리맨 신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삼성전자에서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2000년 이사보에 오르며 임원진에 합류한지 6년 만인 2006년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삼성전자에서 이사보에서 부사장까지 오르려면 보통 12년이 걸리는 데 신종균은 이를 절반으로 단축한 것이다.

대기업 임원이라면 누구나 따놓았을 법한 석·박사 학위나 MBA 경력도 없었다. 학벌과 인맥도 내세울만한 것이 못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종균은 엄청난 노력 끝에 국내 최대기업의 CEO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광운대 학생들과 동문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신화로 평가받는다. 천장호 광운대 총장은 “광운대 출신으로 일류대 졸업생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고 덜 자면서 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종균은 부하 직원들을 다루는데 능숙하고 합리적인 인사평가를 통해 신임을 얻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려 부하직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병엽 팬택 전 부회장은 신종균을 “집요하면서도 매우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맡은 업무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지만 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주위 인재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CEO라고 말한다. ‘갤럭시 노트’도 직원들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제품이다.

신종균은 삼성전자에서도 소문난 ‘일벌레’이자 ‘개발통’이다.

1천만 대 이상 팔린 삼성전자의 ‘이건희폰’과 ‘벤츠폰’, ‘블루블랙폰’, ‘울트라에디션 시리즈’는 모두 그가 개발 책임을 맡은 제품들이었다.

연구원 시절부터 한 번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인물로 유명했다. 젊은 시절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72시간 한 숨도 자지 않고 일했다고 한다.

주변 참모진들이 제발 쉬라고 간청할 정도로 휴일까지 반납하며 일에 몰두한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주말에 출근하면 신종균 사장 얼굴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표에 올라서도 1년 가운데 3분의 1을 해외출장으로 소화했다.

승부근성이 엄청나게 강하다고 전해진다.

최지성 삼성미래전략실장 밑에서 개발팀장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 최지성 실장의 승부사 기질을 그대로 전수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렸던 이유도 경쟁사에 질 수 없다는 개발자 특유의 자존심 때문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노력형’ CEO다.

신종균은 유학경험이 없어 영어발음이 좋지 않았다. 2011년 갤럭시S2 발표 당시 신종균의 이른바 ‘된장 발음’이 페이스북을 통해 생중계돼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트위터 상에 “삼성전자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없어 신종균에게 발표를 맡겼냐”는 반응이 많았다.

신종균은 이에 절치부심했고 차를 탈 때마다 영어 CD를 틀어놓고 그대로 따라하며 노력했다. 신종균은 2013년 갤럭시S4 발표 때 훨씬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어 못하는 CEO’란 평가를 뒤집었다.

삼성의 스마트폰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선사업부를 이끌 당시 국내 휴대전화 시장에 애플 아이폰이 몰고 온 스마트폰 열풍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2009년 10월 윈도 모바일 운영체제(OS)를 탑재한 ‘옴니아2’를 출시했지만 아이폰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성능과 오류로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옴니아2의 국내 판매량은 60만 대에 불과했다.

2009년 12월 사장으로 승진한 신종균에게 내려진 과제는 아이폰을 잡는 스마트폰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는 ‘갤럭시 S’를 만들기 위해 밤낮 없이 일했다. 출시 전까지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근무했다. 크리스마스부터 신정 연휴까지 회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신종균은 사장 취임 후 6개월 뒤인 2010년 6월 갤럭시S를 출시했다. 갤럭시S는 출시 7개월 만에 글로벌 판매 1천만 대 기록을 세우며 삼성전자가 세계 1위 스마트폰 제조사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갤럭시S는 2013년 1월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2500만 대나 팔렸다.

이후 후속 스마트폰들도 모두 흥행을 이어갔다. 2011년 5월 출시된 ‘갤럭시S2’는 4천만 대가 판매됐고 1년 뒤 출시된 ‘갤럭시S3’는 5천만 대 판매를 돌파했다. 2013년 4월 시장에 선보인 ‘갤럭시S4’는 5700만 대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갤럭시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힘입어 신종균은 2011년 12월 스마트폰사업을 담당하는 IM부문을 총괄하게 됐다.

스마트폰시장의 성장이 정체되고 갤럭시S5가 디자인 문제 등으로 판매가 부진하면서 신종균은 2014년 하반기부터 위기설에 시달렸다. 삼성전자는 출하량을 기준으로 생산을 해왔는데 판매가 부진하면서 재고문제가 발생했다.

신종균은 2014년 하반기부터 대외노출을 극도로 자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연말 인사를 앞두고 윤부근 삼성전자 CE부문 사장이 신종균의 IM사장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돈주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이 신종균의 후임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돌았다.

신종균의 입지는 위태로워보였지만 2014년 말 삼성전자 임원인사에서 유임에 성공했다.

신종균은 2015년 갤럭시S6출시를 통해 반전을 꾀했다. 그러나 갤럭시S6는 엣지모델의 수요예측에 실패하면서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

신종균은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의 판매량을 8 대 2 혹은 7 대 3 정도로 예측했지만 실제 판매량은 갤럭시S6와 엣지가 5 대 5 수준이었다. 갤럭시S6는 재고가 남았지만 갤럭시S6엣지는 품귀현상을 빚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S6엣지모델의 수요를 잘못 예측하는 바람에 영업이익에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신종균은 2015년 삼성전자 연말인사에서 무선사업부장을 고동진 사장에게 넘기면서 현장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신종균과 윤부근 대표와 경쟁관계가 삼성전자의 성장을 이끌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두 사람은 2015년말 임원인사에서 나란히 현장일선에서 물러났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광운대 졸업 후 1981년 중소기업인 에코전자에 입사했다 4개월 만에 그만두고 맥슨전자로 자리를 옮겼다.

1984년 삼성전자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연구3실을 거쳐 삼성종합기술원 실장과 무선전송그룹 그룹장, 수출개발그룹 수석연구원 등을 맡았다.

2000년 입사 16년만에 정보통신총괄 이사보로 승진하며 임원진에 합류했다.

2001년 상무보로 승진한 뒤 2002년 임원인사에서 텔레커뮤니케이션총괄 상무에 임명됐다.

2004년 무선사업부로 자리를 옮긴 뒤 곧바로 전무로 승진했다.

2006년 부사장, 2009년 1월 최지성 삼성미래전략실장이 겸직하고 있던 DMC 부문 무선사업부 부장에 임명됐으며 2009년 12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2012년 12월 조직개편으로 권오현 부회장, 윤부근 사장과 함께 삼성전자의 각자 대표이사로 임명됐다.

2015년말 겸직하고 있던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장에서 물러나며 사업을 총괄하는 역할만 맡게 됐다.

◆ 학력

1974년 서울 영등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하공업전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1978년 인하공업전문대 졸업 후 광운대 전자공학과로 편입해 1981년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 가족관계

◆ 상훈

2012년 1월 포춘 코리아로부터 ‘2012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중 글로벌경영 부문에서 수상했다.

2012년 4월 품질경영학회로부터 ‘글로벌품질경영인 대상’을 받았다. ‘갤럭시 시리즈’로 삼성전자를 세계 스마트폰 시장 1위로 만든 공로를 인정받았다.

2012년 4월 한국통신학회로부터 ‘제57회 정보통신의 날 기념 정보통신대상’을 받았다.

2013년 5월 특허청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 한국신뢰성학회로부터 ‘제1회 한국 신뢰성대상’ 중 제조업 부문에서 수상했다.

◆ 상훈

2012년 1월 포춘 코리아로부터 ‘2012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중 글로벌경영 부문에서 수상했다.

2012년 4월 품질경영학회로부터 ‘글로벌품질경영인 대상’을 받았다. ‘갤럭시 시리즈’로 삼성전자를 세계 스마트폰 시장 1위로 만든 공로를 인정받았다.

2012년 4월 한국통신학회로부터 ‘제57회 정보통신의 날 기념 정보통신대상’을 받았다.

2013년 5월 특허청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 한국신뢰성학회로부터 ‘제1회 한국 신뢰성대상’ 중 제조업 부문에서 수상했다.

어록


“저는 최고의 발표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제 모국어는 공학이기 때문입니다”, “아이폰은 우리만큼 ‘펀(fun)’ 하진 않다.” (2015/08/14, 갤럭시S6를 공개하는 삼성갤럭시 언팩 행사에서)

“‘졸면 죽는다’라는 말은 예전 버전이다. 요즘은 ‘굼뜨면 죽는다’고 한다. 1등이 됐다고 자만하면 금방 떨어진다는 뜻이다” (2014/2/24,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2014’ 개막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모두 왼손을 들어보세요” (2013/11/19, 한 매체는 신종균은 해외법인 임원들과 화상회의에서 삼성전자의 스마트 손목시계인 ‘갤럭시기어’를 착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지금도 잊지 않는다. 내 자식 같은 무선전화기가 500억 원어치나 불태워졌다. 가슴 속에 있던 불량에 대한 안이한 마음도 털끝만큼도 안 남기고 다 태워버렸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지금의 삼성은 거기서 시작됐다” (2013/10/28,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신경영 20주년 기념 만찬’에서 1995년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있었던 불량 무선전화기 15만대 화형식을 회고하며)

“삼성전자의 통신특허 없이 휴대전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고 어렵지만 제대로 갈 것” (2012/11/21, 서울 서초사옥에서 기자들과 만나 애플과 벌이던 특허전쟁에 대해 한 말)

“애플 실적이 엄청나더라. 우리는 아직 멀었다.” (2012/4/25, 수요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사옥으로 출근하던 길에 기자들과 만나 한 말)

“기업의 의무는 가치있는 제품을 만들어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다. 좋은 제품과 혁신적 제품을 계속 출시해 전 세계 고객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 (2012/3/8,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애플과 특허전쟁에서) 우리의 브랜드와 자존심을 잃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그들(애플)이 하는 것처럼 하려고 한다.” (2011/10/19, 홍콩 하버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옴니아폰은 출시 당시 최고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상대적으로 구형모델이 됐다.” (2011/4/28,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갤럭시S2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옴니아폰의 성능 논란에 대한 해명)

◆ 평가

신종균은 대한민국에서 샐러리맨 신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삼성전자에서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2000년 이사보에 오르며 임원진에 합류한지 6년 만인 2006년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삼성전자에서 이사보에서 부사장까지 오르려면 보통 12년이 걸리는 데 신종균은 이를 절반으로 단축한 것이다.

대기업 임원이라면 누구나 따놓았을 법한 석·박사 학위나 MBA 경력도 없었다. 학벌과 인맥도 내세울만한 것이 못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종균은 엄청난 노력 끝에 국내 최대기업의 CEO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광운대 학생들과 동문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신화로 평가받는다. 천장호 광운대 총장은 “광운대 출신으로 일류대 졸업생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고 덜 자면서 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종균은 부하 직원들을 다루는데 능숙하고 합리적인 인사평가를 통해 신임을 얻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려 부하직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병엽 팬택 전 부회장은 신종균을 “집요하면서도 매우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맡은 업무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지만 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주위 인재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CEO라고 말한다. ‘갤럭시 노트’도 직원들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제품이다.

신종균은 삼성전자에서도 소문난 ‘일벌레’이자 ‘개발통’이다.

1천만 대 이상 팔린 삼성전자의 ‘이건희폰’과 ‘벤츠폰’, ‘블루블랙폰’, ‘울트라에디션 시리즈’는 모두 그가 개발 책임을 맡은 제품들이었다.

연구원 시절부터 한 번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인물로 유명했다. 젊은 시절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72시간 한 숨도 자지 않고 일했다고 한다.

주변 참모진들이 제발 쉬라고 간청할 정도로 휴일까지 반납하며 일에 몰두한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주말에 출근하면 신종균 사장 얼굴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표에 올라서도 1년 가운데 3분의 1을 해외출장으로 소화했다.

승부근성이 엄청나게 강하다고 전해진다.

최지성 삼성미래전략실장 밑에서 개발팀장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 최지성 실장의 승부사 기질을 그대로 전수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렸던 이유도 경쟁사에 질 수 없다는 개발자 특유의 자존심 때문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노력형’ CEO다.

신종균은 유학경험이 없어 영어발음이 좋지 않았다. 2011년 갤럭시S2 발표 당시 신종균의 이른바 ‘된장 발음’이 페이스북을 통해 생중계돼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트위터 상에 “삼성전자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없어 신종균에게 발표를 맡겼냐”는 반응이 많았다.

신종균은 이에 절치부심했고 차를 탈 때마다 영어 CD를 틀어놓고 그대로 따라하며 노력했다. 신종균은 2013년 갤럭시S4 발표 때 훨씬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어 못하는 CEO’란 평가를 뒤집었다.

삼성의 스마트폰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선사업부를 이끌 당시 국내 휴대전화 시장에 애플 아이폰이 몰고 온 스마트폰 열풍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2009년 10월 윈도 모바일 운영체제(OS)를 탑재한 ‘옴니아2’를 출시했지만 아이폰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성능과 오류로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옴니아2의 국내 판매량은 60만 대에 불과했다.

2009년 12월 사장으로 승진한 신종균에게 내려진 과제는 아이폰을 잡는 스마트폰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는 ‘갤럭시 S’를 만들기 위해 밤낮 없이 일했다. 출시 전까지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근무했다. 크리스마스부터 신정 연휴까지 회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신종균은 사장 취임 후 6개월 뒤인 2010년 6월 갤럭시S를 출시했다. 갤럭시S는 출시 7개월 만에 글로벌 판매 1천만 대 기록을 세우며 삼성전자가 세계 1위 스마트폰 제조사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갤럭시S는 2013년 1월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2500만 대나 팔렸다.

이후 후속 스마트폰들도 모두 흥행을 이어갔다. 2011년 5월 출시된 ‘갤럭시S2’는 4천만 대가 판매됐고 1년 뒤 출시된 ‘갤럭시S3’는 5천만 대 판매를 돌파했다. 2013년 4월 시장에 선보인 ‘갤럭시S4’는 5700만 대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갤럭시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힘입어 신종균은 2011년 12월 스마트폰사업을 담당하는 IM부문을 총괄하게 됐다.

스마트폰시장의 성장이 정체되고 갤럭시S5가 디자인 문제 등으로 판매가 부진하면서 신종균은 2014년 하반기부터 위기설에 시달렸다. 삼성전자는 출하량을 기준으로 생산을 해왔는데 판매가 부진하면서 재고문제가 발생했다.

신종균은 2014년 하반기부터 대외노출을 극도로 자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연말 인사를 앞두고 윤부근 삼성전자 CE부문 사장이 신종균의 IM사장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돈주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이 신종균의 후임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돌았다.

신종균의 입지는 위태로워보였지만 2014년 말 삼성전자 임원인사에서 유임에 성공했다.

신종균은 2015년 갤럭시S6출시를 통해 반전을 꾀했다. 그러나 갤럭시S6는 엣지모델의 수요예측에 실패하면서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

신종균은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의 판매량을 8 대 2 혹은 7 대 3 정도로 예측했지만 실제 판매량은 갤럭시S6와 엣지가 5 대 5 수준이었다. 갤럭시S6는 재고가 남았지만 갤럭시S6엣지는 품귀현상을 빚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S6엣지모델의 수요를 잘못 예측하는 바람에 영업이익에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신종균은 2015년 삼성전자 연말인사에서 무선사업부장을 고동진 사장에게 넘기면서 현장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신종균과 윤부근 대표와 경쟁관계가 삼성전자의 성장을 이끌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두 사람은 2015년말 임원인사에서 나란히 현장일선에서 물러났다.

◆ 기타

자칭 등산 마니아다. MWC2013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주로 토요일에 사원 20여 명과 산에 간다”고 밝혔다. 아들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오른다. 직원들과 산에 오르는 까닭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젊은 직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2013년 12월 휴대전화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지문인식 기능을 발명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특허청이 운영하는 특허정보넷 키프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2011년 10월 14일 출원한 특허 ‘휴대용 단말기에서 지문인식을 지원하기 위한 장치 및 방법’(출원번호 10-2011-0105379)의 발명자로 신종균이 기재됐다.

2014년 무려 145억 7200만 원 보수를 받아 국내기업 CEO 가운데 연봉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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