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응변이 뛰어나다.
장영신이 경영에 뛰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73년 ‘오일쇼크’가 터졌다. 물가가 치솟아 소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장영신은 원부자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사와 미국 걸프사 등을 직접 방문했다. 그 결과 우유비누와 트리오 등 대표상품의 수출길이 열리게 됐다.
사내에서 장영신은 ‘호랑이’로 통한다.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는 성격과 한번 결정하면 매몰차게 추진해 나가는 돌파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항상 카리스마로 주위를 압도했으며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뛰어나다.
특히 조서환 전 KTF 부사장과 인연이 깊다. 한쪽 팔이 없어 번번이 입사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그를 채용한 뒤 믿고 맡겼다.
조 전 부사장은 애경그룹에서 ‘하나로 샴푸’ ‘2080 치약’ ‘다이알비누’ 등을 히트시키며 ‘마케팅 달인’으로 거듭났다. 그는 장 회장에 대해 “그 양반에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게 있다”고 평가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2년부터 1997년까지 애경유지공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1985년 애경그룹 회장에 올랐다. 외부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19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맡았다. 2005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겸임했다.
2001년 10월부터 애경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10월부터 한국과학기술원 이사도 겸임하고 있다.
◆ 학력
1955년 경기여고를 나와 1959년 미국 체스트넛힐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체스트넛힐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199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2011년 카이스트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어머니 문금조씨와 아버지 장회근씨의 4남 4녀중 막내딸이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6·25 전쟁이 터지자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장영신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돈 안 들이고 대학에 가는 방법을 찾았다. 당시 외국어 능력을 인정 받아 교장선생님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시켰다.
남편 채몽인 선대회장과 어릴적부터 알고 지낸 이웃사촌이었다.
채몽인 선대회장은 ‘애인경천(愛人敬天)’ 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애경이란 이름을 지었다.
장영신의 3남 1녀가 모두 애경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남 채형석 애경 총괄 부회장과 차남 채동석 애경그룹 유통부동산개발부문 부회장, 삼남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 장녀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이 장영신의 자녀들이다.
장남인 채형석 부회장은 사실상 회사 경영권을 확보하자 장 회장과 달리 공격경영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채 부회장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어머니에게 “엄마, 걱정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장사하면 되잖아”라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는 1993년 9월10일 애경백화점 구로 개점식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해 장 회장을 감동시켰다.
큰 딸 채은정 부사장은 외숙모 소개로 안용찬 애경 부회장과 결혼했다. 맏사위 역시 장 회장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다.
안 부회장은 1995년 애경산업 사장에 오른 뒤 2006년 생활항공부문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2014년부터 제주항공 경영총괄 부회장을 겸직하고 있다.
삼남 채승석 사장은 한성주 SBS 아나운서와 1999년 결혼했으나 5개월 만에 이혼했다.
◆ 상훈
1994년 자랑스러운 경기인상, 1995년 국민훈장과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9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2004년 한국경영사학회 제11회 창업대상과 2009년 미국 체스트넛힐대학의 2009년 눈부신 업적을 남긴 졸업자상을 받았다.
◆ 상훈
1994년 자랑스러운 경기인상, 1995년 국민훈장과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9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2004년 한국경영사학회 제11회 창업대상과 2009년 미국 체스트넛힐대학의 2009년 눈부신 업적을 남긴 졸업자상을 받았다.
어록
“뿌리깊은 나무는 어떤 세찬 비바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60년 동안 생활용품·유통·항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쉼 없는 성장과 도약을 해 온 애경인의 개척자 정신에 남다른 긍지를 느낀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교차하듯 경제 역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잘 나갈 때 어려울 때를 대비하고, 힘들 때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담담하고 의연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이루어내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14/06/08, 애경그룹 창립 60주년 기념사)
“선택과 집중으로 효율성을 강화하고 신 사업을 적기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 경영계획을 실현해 나가겠다. 시장 다변화와 업태혁신 등을 통해 수익성을 더욱 확대하고 인재육성에도 역점을 두겠다.” (2012/01/15, 애경그룹 2012년 신년사에서 사업부문별 목표를 발표하며)
“이공계 기초학문이 국가 경쟁력을 살리는 길이다. 카이스트가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이공계 고급 두뇌 양성에 더욱 힘써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발전기금을 전달하게 됐다. 이 기금이 안정적 학업환경 조성과 학생들의 복지향상에 사용되기를 바란다.” (2011/05/02,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30억 원을 기부하며)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보다 강하거나, 남보다 잘난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묵묵히 노력한다는 것이다. 긍정적 생각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목표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경험으로 확인했다.” (2010/12/13, 기업경영 40주년을 맞아 자서전 ‘스틱 투 잇(Stick to it)!’을 출간하며)
“애경은 50년 전 우리 국민이 무엇 하나 쓸 만한 생필품이 없던 시절에 유지사업을 시작해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남다른 긍지를 느낀다.” (2004/06/08 애경그룹 창립 50돌 맞아 CI(기업이미지)를 변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