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 정부 2년차에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맡았다. 임기는 총선이 열리는 2020년까지 2년이다.
이해찬은 2018년 7월20일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그는 “당의 중진으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불가피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해찬은 기무사 계엄령 문건이 출마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건 우리 역사를 50년 후퇴시키는 것”이라며 “상황이 점점 엄중한 상황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최종적으로 출마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8월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국무총리까지 해 바라는게 없고 사심이 없어 공정할 수 있다”며 “든든하고 강한 민주당을 만드는데 전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해찬은 42.88%의 지지를 받아 송영길(30.73%) 김진표(26.30%) 의원을 제치고 당대표에 선출됐다. 7선의 경륜을 내세워 강한 여당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두루 지지를 얻은 것으로 풀이됐다.
취임과 함께 협치를 앞세우며 첫 공식행보로 8월27일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았다. 8월29일에는 경북 구미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대구·경북지역 민심을 얻어 20년 집권 가능한 전국정당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일환으로 파악된다.
8월30일 고위당정청협의회 회의에서 종합부동산세 강화 의지를 드러냈고 월1회 당정청회의 정례화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9월4일에는 6년 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등 문재인정부 경제정책을 지지하며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 ▲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18년 8월25일 당대표에 선출된 후 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
△민주통합당 대표
19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한명숙 대표의 뒤를 이어 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를 지내며 18대 대선을 치르는데 발판을 놓았다.
2012년 6월9일 민주당 임시 전국대의원대회에서 24.3%를 득표해 23.8%를 얻은 김한길 후보를 박빙의 차이로 꺾고 대표에 올랐다. 대의원 투표는 김한길 후보가 앞섰으나 모바일과 현장투표를 합산한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해찬이 앞질렀다.
이해찬은 “민주당을 안정된 수권 정당으로 만들고 일자리와 민생 정책으로 국민에게 희망이 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며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를 들고 대선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취임 한 달 기자회견에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에 당의 명운을 걸겠다며 모든 대선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핵심공약으로 제시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종북주의라며 공격하는 박근혜 새누리당의 매카시즘에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며 신매카시즘 논란을 점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해찬은 대선을 끝까지 치르지 못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가 정치 쇄신을 요구하며 후보 단일화의 명분을 요구하자 최고위원 전원과 함께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이해찬은 “오직 정권 교체와 단일화를 위한 하나의 밀알이 되고자 한다”며 “더 이상 문재인 후보의 고뇌를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책임총리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며 소신 있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였다.
이해찬은 16대 대선 때 노무현캠프 선거기획단장,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기획준비단장을 지내는 등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에서 돌아와 권한대행을 맡았던 고건 총리가 물러나자 국무총리에 발탁됐다. 노 대통령은 책임총리제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이해찬에게 힘을 실어줬다.
국무회의를 이해찬이 주재하고 노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만 참여했다. 이해찬은 인사 등에도 상당 부분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 공개적 자리에서 “대통령 측근이나 사조직이 발휘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하며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유념하도록 당부하기도 하는 등 다른 총리들보다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대통령과 의견이 다를 때는 목소리를 높이며 충돌하기도 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입각을 놓고 의견을 달리하며 물러서지 않아 노 대통령이 “그러려면 총리를 그만 두라”고 했을 정도다.
| ▲ 이해찬 국무총리가 2004년 6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
△이해찬 세대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교육 개혁정책을 펼쳤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이해찬 교육정책의 영향을 받은 세대를 '이해찬 세대'로 부른다. 20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역 02학번으로 입학한 1983년생이 이해찬 1세대, 2003년 졸업 후 03학번으로 입학한 1984년생이 이해찬 2세대다.
이해찬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1998년 2월 제38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전형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수시 전형을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야간 자율학습, 월말고사, 학력교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했다. 내신 평가에 수행평가를 의무화한 것도 이 때다.
상대적으로 면학 강도가 낮아지면서 이해찬 세대를 '단군 이래 최저 학력'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해찬 1세대가 치른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역대 최고로 어려웠던 1997학년도 수능에 버금갈 정도로 어려운 불수능으로 출제되면서 단 한 명의 만점자도 나오지 않아 이런 인식이 더욱 깊게 뿌리박혔다. 2002학년도 수능은 전년 대비 문과는 평균 98.2점, 이과는 91.3점이 하락했다.
이해찬은 나중에 그의 교육정책이 학력저하를 낳았다는 논란과 관련해 인터뷰 등을 통해 '옳은 방향이었다'며 수능 대신 면접 등을 다양하게 반영하겠다는 취지였는데 언론이 한 과목만 잘하면 대학에 간다고 잘못 보도했다고 해명했다. 학력 저하는 없었으며 '공부 못 했던 일부의 넋두리'라는 말도 했다.
이 외에 학생 인권을 높이기 위해 과도한 체벌과 구타를 하지 못하도록 지침이 마련됐다. 이를 계기로 원산폭격 등 교육현장에서 이뤄지던 체벌과 구타가 크게 줄어들었다. 교원 정년을 만65세에서 만62세로 단축하고 교원 성과급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조치는 교원 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1999년 5월 교육부 장관에서 물러났다.
| ▲ 이해찬 민주당 의원이 1992년 14대 대선 때 노무현 의원과 함께 김대중 후보의 지원유세를 기다리고 있다. |
△세종시 애정
이해찬은 세종시 입안자로서 현재는 세종시 지역구 의원이기도 하다. 이해찬은 “공직은퇴 후 세종시에서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등 세종시에 애착을 보였다.
이해찬은 대선 때부터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기획하고 추진한 당사자다. 총리가 된 뒤에도 가장 중요한 국정 현안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꼽았고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록 수도 이전은 위헌 판결을 받았으나 중앙행정기관 등을 이전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 신도시인 행복도시가 탄생하게 됐다. 행복도시는 이해찬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착공했고 2012년에는 지방자치단체로서 세종특별자치시가 설립됐다.
이해찬은 1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복귀할 때 세종시를 지역구로 선택했고 무난히 당선돼 20대 재선까지 성공했다.
이해찬은 20대 국회에서 세종시 의원 숫자를
늘리고 자치조직권을 강화하는 세종시 특별법 개정안과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는 행복도시 특별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2018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된 뒤에도 세종시 국회 분원(세종의사당) 설치를 주장하는 등 과거 세종시 구상을 완성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7선의 선거 이력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후보로만 출마해 7선을 했으며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민주당계 정당이 자주 이름을 바꾸면서 7선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이름의 정당으로 출마한 적이 없으며 무소속 출마가 한 번 있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31.18%로 당선됐다. 재선 의원이던 김종인 민주정의당 후보와 4선 의원이었던 김수한 통일민주당 후보를 꺾었다. 당시 35세로 13대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다.
14대 때도 역시 같은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4.69%의 득표율로 김수한 민주자유당 후보를 꺾었다. 15대 때는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출마해 44.75%로 박홍석 신한국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16대 총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47.48%의 득표율로 권태엽 한나라당 후보를 제쳤다. 17대 때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출마해 41.11%를 득표해 김철수 한나라당 후보와 유종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꺾고 5선에 성공했다.
18대 총선은 출마하지 않았으며 19대 총선에서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겨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자유선진당 대표인 심대평 후보와 신진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47.88%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개인 역대 최고 득표율을 보였다.
20대 총선 때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정무적 판단을 내세우며 이해찬을 공천하지 않자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했다. 박종준 새누리당 후보와 문흥수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꺾고 43.72%를 득표하며 무난하게 당선됐다.
당선된 후 9월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해 당내 최다선 의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