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27일, 제3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보낸 대북특별사절단은 2018년 3월5일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북측과 합의했다. 당시 조명균은 국내에서 대북특사단의 일정을 지켜보고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무위원장,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해 열린 데 이어 11년 만에 3번째로 다시 열리는 것이다.
정부는 2018년 3월15일에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조명균은 총괄 간사를 맡았고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는 북한 대표단과 협력해 의제와 동선 등을 결정했다.
남북 정상은 27일 오전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만난 뒤 남측의 공식환영식에 이어 남북 정상회담과 환영 만찬에 참석한다.
북측은 판문점 북측 구역부터 생중계를 포함한 남측 기자단의 취재를 허용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남북은 27일 정상회담 전까지 판문점에서 리허설도 진행한다.
남북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 남북관계 진전 등 3가지 의제를 놓고 중점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다만 허심탄회한 논의를 위해 의제를 세밀하게 정하지 않았다.
남한 정부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가 정례화되길 기대하고 있다. 정상 사이 핫라인은 이미 개통됐고 향후 판문점 회담 등이 정기적으로 마련되길 바라는 것이다.
임종석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겸 대통령 비서실장은 2018년 4월17일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남북 정상회담의 평가가 좋으면 판문점 회담이 정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여부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길잡이 회담’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이끌어
조명균은 북한에 ‘북측 참가문제 등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자’고 제안하며 남북대화의 물꼬를 텄다.
조명균은 2018년 1월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 1월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고위급회담을 개최할 것을 북측에 제의한다”고 밝혔다.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놓은 후였다.
북한은 2018년 1월5일 고위급회담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명균은 9일 천해성 통일부 차관과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남북은 고위급회담에서 평창동계올림픽 파견을 합의했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선수단을 체계적으로 지원해 행사를 내실있고 안전하게 치를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남한은 북한에 평화의집 차관급 후속회담을 제안했고 북한은 ‘예술단 실무접촉’을 역으로 제의했다. 이후 남북은 15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예술단 실무접촉을 개최해 관현악 예술단의 서울·강릉 공연을 합의했다.
통일부는 2018년 1월16일에 정부합동지원단을 꾸려 북한의 평창올림픽 및 동계 패럴림픽 대회 참가와 예술단 행사 등의 활동을 지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2018년 1월20일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남북 대표단과 협의를 한 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승인했다. 북한 선수단 46명은 5개 세부 종목에 참가했다.
특히 남북은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입장하도록 하고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구성하면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세계에 보여줬다. 김여정 제1부부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등 북측 대표단은 2018년 2월9일에 방남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교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국 언론들은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북핵문제를 가릴 수는 없다”며 평창올림픽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중장기적 통일 로드맵으로 한반도 신경제지도 실현 꿈꿔
조명균은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통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는 환동해 경제벨트와 접경지역 경제벨트, 환서해 경제벨트 등 3대 벨트를 구축해 한반도의 새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한국경제와 북방경제의 연계를 추진하는 것으로 ‘경제통일’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남한은 이를 위해 해외에서 러시아와 협력을 시작했고 중국 등 관계된 여러 나라들과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남북 경제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조명균은 2017년 11월17일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학술회의에서 “동북아의 끊어진 고리인 한반도가 경제벨트로 연결되면 남북한과 동북아는 더 큰 번영을 이룰 것”이라며 “이렇게 어우러져 살아가다 보면 평화적 통일의 길 또한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 ▲ 조명균(왼쪽)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2017년 6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 마련된 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
△‘개성공단의 산파’ 조명균
조명균은 2003년 개성공단이 첫 삽을 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통일부 장관에 오른 뒤 가장 먼저 개성공단 생각을 했다"고 할 정도로 개성공단에 큰 애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의 중장기적 협력 개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방안 가운데 하나다.
조명균은 2017년에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그럴만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봤다.
그는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요청했던 긴급구호안정자금 등의 지원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2017년 9월20일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정책혁신위원회를 꾸리고 이전 정부의 대북정책을 점검하고 정책 혁신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개성공단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큰 산은 미국이었다.
개성공단사업 초기에 미국을 설득하는 게 어려운 과제였다고 정세현 전 통일장관은 2013년 4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조명균은 2004년 10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통일부 개성공단사업지원단 단장을 맡으며 개성공단 출범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개성공단의 산파'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과 미국의 협약에 의해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장비들이 군사적으로 전용될지를 판단하는 권한이 미국 상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중소기업이 개성공단에 가지고 들어가는 장비에 미국의 기술이 10%만 들어 있어도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조명균은 당시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으로서 미국 상무부를 두 차례 방문했고 “개성공단이 한국 경제의 활로인데 동맹국인 미국이 도와줘야 한다”고 말해 설득에 성공했다.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13일 조명균을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조명균은 2000년, 2007년 등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금강산 관광, 경의선 철도연결, 개성공단 등 이른바 ‘통일부 3대 남북 경제협력 프로그램’을 실무적으로 주도한 햇볕정책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온 조명균을 통일부 장관에 지명한 것은 남북관계를 대화로 풀어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특히 남북관계는 이론보다 실무라는 판단으로 교수나 정치인보다 정통관료를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인사 발표 후 브리핑에서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는 등) 어려운 여건에 있지만 조명균 후보자가 지닌 능력과 요건을 충분히 검토했다”고 말했다.
조명균은 2017년 6월29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
조명균은 문재인 정부의 입각 후보자 가운데 청문회 당일 청문보고서가 채택된 첫 후보자였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 이어 두 번째로 학계나 외부가 아닌 통일부 출신 장관이 됐다. 행시를 거쳐 정통관료로 통일부 장관에 처음 오르게 된 것이다.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은 조명균에게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중단, 5·24조치에 따른 피해기업지원,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현안을 놓고 소신있게 직무를 수행해달라고 당부했다.
△통일부 퇴임 후 야인생활
조명균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2008년 2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안보정책비서관에서 통일부로 복귀했다.
그러나 전 정권 인사로 낙인찍히면서 보직을 받지 못한 채 교육대기 발령을 받고 2008년 10월 명예퇴직했다.
조명균은 퇴임 뒤 9년 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가톨릭교리신학원을 다니며 신학을 공부해 평신도를 교육할 자격을 취득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민화위)의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는 철저한 야인 생활로 보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조명균은 9년 동안 철저히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며 “아들도, 재산도, 논문도 없는 3무(無)후보”라고 말했다.
△남북 정상회담의 주역
조명균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과 2007년 10·4 남북 정상회담의 실무주역이다.
6·15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실무기획단 간사를 맡아 선 실무 준비를 책임졌다. 10·4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대통령비서실 안보정책비서관으로 공식수행원 13명에 포함됐다.
2007년 8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특사로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북측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남북정상회담을 논의하던 자리에 배석했다.
조명균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무위원장의 단독회담에 배석해 회담 내용을 기록하고 정리했다. 북측과 10·4 정상선언 문안 조율에도 참여했다.
조명균은 이때 회의록을 기록했던 일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공개됐을 때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게 됐다.
△금강산관광과 경의선 철도 연결
조명균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통일부 교류협력국 국장을 맡아 금강산관광 남북당국간 회담, 남북철도와 도로연결 실무접촉에서 남측 대표로 나섰다.
철도·도로 연결사업, 금강산관광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도록 주도해 통일부에선 ‘남북경협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조명균은 금강산관광의 뱃길 관광에 이어 육로 관광까지 성사했다. 당시 금강산 관광사업이 수익성을 확보하려면 육로 관광이 필수적이라며 북측을 설득하는 데 공을 들여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순항하던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11일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 병사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그 다음 날부터 전면 중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