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당선과 국정운영
문재인은 2017년 5월9일 19대 대통령선거에 41.1% 의 득표로 2위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역대 최대인 17.7%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당선됐다.
촛불정신을 받들어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내걸고 대통령 직무를 시작했다.
국정 초반 인수위 없이 곧바로 업무를 시작하게 돼 어려움을 겪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꾸려 사실상 인수위의 역할을 대신했고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분과별로 국정과제를 선정해 7월 보고대회에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국가비전으로 제시하고 △국민이 주인인 정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5대 국정목표로 정했다.
이에 따라 20대 국정전략과 100대 국정과제를 선정하고 487개 실천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사람 중심 경제를 전면에 내세워 일자리경제·소득주도경제·공정경제·혁신경제를 경제정책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중심에 있는 것은 일자리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가계소득을 늘리고 이를 경제성장 동력으로 삼는다는 구상을 세웠다.
이에 따라 취임 후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를 신설하고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했다. 일자리 100일 계획, 일자리 5년 로드맵 등 일자리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또 6월에는 11조2천억 원 규모의 일자리 추경 예산을 편성해 집행했고 2018년도 예산안에도 공무원 9450명을 증원하는 방안이 담겼다.
탈원전·탈석탄과 신재생에너지 육성을 담은 에너지전환 정책 로드맵, 공공·공적주택 공급 확대를 추진하는 주거복지 로드맵, 지능화기술 연구개발과 인재 양성을 위한 4차산업혁명 대응계획 등을 주요정책으로 펼치고 있다.
사회분야는 적폐청산을 내걸고 국정농단 수사부터 권력기관 개혁까지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을 넘어 이명박 정권까지 적폐청산 대상이 되면서 야권에서 정치보복이라는 말도 나온다.
검찰에서 진행하고 있는 적폐청산 관련 사건은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방해 의혹,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청와대 및 국정원 보수단체 불법지원, BBK 관련 고발 등 10여 건이 넘는다. 이 와중에 국정원은 조직명을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바꾸고 수사권을 모두 포기하는 개혁안을 마련했다.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설치하는 검찰 개혁 방안도 추진 중이다.
외교·안보분야에서 당초 문재인이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입장이 강했으나 정부 출범 후 북한 핵실험과 11차례 미사일 발사가 이뤄지면서 남북관계가 완벽한 경색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문재인 역시 현재 상황은 대화보다 제재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며 11월과 12월 두 차례 대북 독자제재를 발표하기도 했다. 다만 북한에 태도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은 이어가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과 한미FTA 개정협상을 앞두고 있고 중국과는 지난 정부부터 이어오고 있는 사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외교부에서 한일 위안부합의 검토 결과를 발표한 뒤 사실상 위안부 합의 파기를 시사하면서 한일관계 역시 경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러시아·아세안 등 다른 나라들과는 신북방정책·신남방정책을 통해 협력의 폭을 적극적으로 넓혀가고 있다.
| ▲ 문재인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2017년 12월14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한중정상회담을 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
△박근혜 게이트와 대선후보 문재인
문재인은 2016년 하반기 박근혜 게이트가 빚어낸 긴박한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대선후보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2016년 11월 박근혜 게이트 정국에서 처음에는 신중론을 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 당내 2~3위권 대선후보들이 명확하게 탄핵을 요구하는 반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한동안 지켰다.
그러나 2016년 11월15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과 함께 전국적 퇴진운동에 나서겠다며 강경노선으로 전환했다. 2016년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2017년 3월10일 파면이 선고되는 과정에서 가장 수혜를 입은 후보로 평가됐다.
문재인의 대선후보 지지율은 2016년 11월에 20%대 초반이었는데 2017년 2월 초에 30%를 넘어선 뒤 3월 말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선두를 지켰다. 문재인이 제1야당의 주요 대선주자인 점과 원칙주의적 성향을 보여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척점으로 평가된 점 등 덕분에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정치권은 바라봤다.
2017년 4월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해 호남권, 충청권, 영남권, 수도권강원제주 등 네차례 실시된 권역별 순회경선에서 누적득표율 57.0%를 차지해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을 제치고 결선투표 없이 본선으로 직행하면서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당대표 문재인과 인재영입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시절 당내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친노’의 한계를 보여줬다고 지적됐다. 그러나 인재영입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1당으로 올라서는 데 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6개월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 너무 빨리 정치일선에 복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나왔다.
야권 정치인으로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10.4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세월호 참사 정국 등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박근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문재인은 2015년 2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후보를 제치고 대표에 올랐다. 이때 박지원 후보에 고작 3%포인트만 앞섰을 정도로 당내 장악에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친노-비노 갈등이 불거지며 독선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문재인과 안철수 의원의 대립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분열하자 비주류의 사퇴론에 직면했다.
2015년 12월28일 당이름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꿨다. 2016년 1월27일 대표에서 물러났다.
2015년 12월부터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외부인사를 영입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16년 4월 총선에서 123석을 얻어 새누리당을 제치고 원내1당에 올랐다. 당시 문재인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 이수혁 전 국정원 1차장,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김병기 전 국정원 인사처장,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서형수 전 한겨레 사장, 박주민 전 민변 사무차장 등을 더불민주당에 영입했다.
이 가운데 표창원 김병관 박주민 조응천 김병기 이철희 서형수 의원 등이 2016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 열풍을 이끌며 20대 국회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조응천 의원은 청와대에서 퇴직한 뒤 아내의 식당에서 일하던 시절 문재인이 그를 영입하러 찾아왔을 때 몇번이나 거절했는데도 ‘눈만 껌뻑 껌뻑거리며 도와달라던’ 문재인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결국 정치에 입문했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2016년 1월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멘토’로 불렸던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김종인 위원장을 영입하면서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도 민주당의 총선 승리에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재인과 김종인 전 위원장은 그 뒤 관계가 악화됐다. 김 전 위원장이 총선에서 공천 전권을 행사하고 문재인이 고립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총선 이후에도 총선승리의 공로 평가, 당대표 합의추대, 야권연대 등에서 시각차를 보였다. 결국 김 전 위원장은 2017년 3월8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18대 대선 패배
문재인은 18대 대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다. 지지율 조사에서 오차범위 안의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졌다.
2012년 4월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8월25일부터 9월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선출됐다.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 뒤 사퇴하는 등 범야권의 지지를 얻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지지율에서 다소 밀렸지만 당시 여론이 좌우로 사실상 양분되면서 대선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문재인의 지지율이 올랐다.
그러나 2012년 12월19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약 100만 표 차이로 졌다. 당시 문재인은 1469만 표(48.0%)를 얻었는데 이는 탈락후보 사상 최다 득표이자 역대 대선후보들 가운데 두번째로 많은 득표다.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요인으로 독자적 리더십을 세우는 데 실패해 국민들에게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
문재인은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법조계 동업자로서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문재인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했을 때 ‘법률가는 억울한 서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앤장 등 대형로펌의 영입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다면 노모를 모실 수 있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해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김광일 노무현 변호사 등과 함께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에 변호인을 맡은 것으로 언론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부산에 1982년 내려왔고 부림사건은 그 전의 일이다.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87년 대우조선 사건으로 노 변호사가 구속되자 문재인은 부산지역 변호사를 동원해 변호인단을 만들어 그를 변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권에 인도한 장본인이다.
1988년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참여 요청을 받은 그는 "정치인 자질은 노무현씨가 훨씬 더 탁월하다"며 노무현 변호사를 추천했고 노무현 변호사는 이를 거듭 피하다 결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는데도 “나는 참모용이고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으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변호사 업무에 복귀할 뜻을 여러차례 밝혔다.
그러나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자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고 하자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 제의를 수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흔들릴 때마다 문재인이 "정치를 끝까지 계속해 달라"고 애걸 반 압박 반으로 주문했던 만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이때 치아가 10개나 빠져 임플란트를 하면서 발음이 안 좋아졌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위기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2007년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에서 '왕수석',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으로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국정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한 뒤 장례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다. 그 뒤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사법시험 합격과 사법연수원 시절
사법시험에 한차례 재수한 끝에 1980년 차석으로 합격해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문재인은 10대 시절 역사학자를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을 감안해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1978년 2월에 제대한 직후 아버지 문용형씨가 59세로 별세하자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아버지에게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시위 참가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다가 2차 합격소식을 들었다.
1980년 사법시험 3차 면접시험을 볼 때 안전기획부 요원으로부터 지금도 옛날에 시위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는지 질문받자 “지금도 변함없다”고 대답했다. 최종적으로 합격했지만 훗날 원하던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고승덕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김용덕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수료했다. 원래 성적은 수석이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 ▲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17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100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