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당대표로 복귀
2017년 8월27일 대통령선거 패배 3개월여 만에 새 대표로 복귀했다.
안철수는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2만9095표(51.09%)를 얻어 대표에 선출됐다. 과반 득표율로 결선투표없이 당선을 확정했다. 임기는 2019년 1월까지로 내년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 등을 이끈다.
안 대표는 이날 당 대표 선출로 대선패배 3개월여 만에 다시 정치전면에 나서게 됐다. 안 대표의 당 대표 선거출마를 놓고 당내에서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당원들의 재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번 당선으로 국민의당은 안철수 대표가 창업주이자 당의 ‘간판’ 임을 다시 확인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과 안 대표의 대선 후보 시절 공약이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적폐 청산과 개혁 입법을 추진하는 데 초당적 협력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정용기 자유한국당 원내수석대변인은 “문재인 정부가 인사청문 정국 등에서 오만한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건 국민의당이 보여준 자세, 처신 등과 무관치 않다”며 “문재인 정부의 독선, 독주, 견제하는 야권 공조를 굳건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대 대선 뼈아픈 참패
안철수는 2017년 5월9일 19대 대선에서 득표율 21.4%로 3위에 그쳤다. 문재인 대통령이 41.1%,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24%를 기록했다.
텃밭으로 여겼던 호남에서조차 문 대통령에게 큰 표차로 뒤져 참패하면서 지역적 지지기반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안철수는 대선과정에서 국민의당 중심의 집권전략인 ‘자강론’을 강조했다.
안철수는 2016년부터 자강론을 주장했는데 2017년 3월 들어 지지율이 오르면서 힘을 받았다. 2017년 3월30일 발표된 리얼미터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안철수는 17.4%의 지지율로 안희정 충남지사를 끌어내리고 10개월 만에 2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지지율이 오르면서 박지원 당시 국민의당 대표와 김무성 당시 바른정당 고문 간의 물밑 라인을 통한 중도·보수 통합론도 잦아들었다. 안철수는 2017년 4월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인천지역 순회 경선에서 “정치인에 의한 공학적 연대론은 모두 불살랐다. 국민에 의한 연대, 그길만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며 인위적 연대론과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2016년 20대 총선 때 민주당의 야권통합 요구에 맞서 “기득권 양당체제를 깨뜨리겠다. 광야에서 혼자 죽어도 좋다”고 외쳤던 것과 흡사한 태도였다.
안철수는 문재인 후보를 정면 공격하면서 양자 대결을 부각하려는 전략을 구사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 ▲ 2017년 8월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민의당 임시전국당원대표자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안철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뉴시스> |
△경제공약 발표
19대 대선과정에서 대기업의 금융계열사와 다른 분야의 계열사를 통합해 관리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안철수는 2017년 3월16일 국회에서 경제공약을 발표하면서 “삼성그룹과 한화그룹 등 대기업집단의 제조사와 금융사를 통합해 감독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금융 및 보험계열사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규제를 도입하고 계열사 사이의 출자를 적격자본에서 공제하도록 하는 그룹자본 적정성평가 시스템을 실시하기로 했다. 또 그룹 전체의 위험을 관리하고 지배구조를 감독할 수 있는 제도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삼성그룹과 롯데그룹 등 금융계열사를 보유한 주요그룹들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을 추진하는 가운데 안철수가 대기업의 금융 및 제조계열사를 통합해 관리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4·13 총선에서 국민의당 약진
안철수는 2016년 4·13 선거에서 ‘국민의당 돌풍’을 일으키며 최상의 결과를 얻었다.
국민의당은 선거 전 여론조사와 달리 정당명부 투표에서 새누리당 다음의 지지를 얻어 전국정당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38석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6년 만에 양당체제가 허물어지고 다당체제의 출발점이 되는 선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도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어느 당도 국민의당의 협조가 없이는 법안처리를 못하게 되었다. 국민의당은 총선을 통해 38석이라는 큰 성과와 함께 캐스팅보트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호남에서 큰 성과와 달리 나머지 지역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한계점으로 지목됐다. 국민의당은 지역구 25석 중 수도권 2석, 호남 23석. 13석은 비례대표 의원으로 의석을 얻었다.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안철수는 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안철수는 문재인 대표가 조선대 강연에서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하자고 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안철수는 다시 역제안으로 혁신 전당대회를 제안했으나 문재인 대표는 이를 거부했다.
안철수는 당시 당이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봤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혁신 전당대회라는 타개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12월13일 국회 정론관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떠나며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겠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안철수는 당시 “지금 야당은 국민께 어떤 답도 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을 바꿀수도, 정권교체의 희망을 만들지도 못합니다, 더 큰 혁신은 배척당하고 얼마 되지 않는 기득권 지키기에 빠져있습니다”며 문재인 대표를 비판했다.
△18대 대선
안철수는 2012년 9월19일 제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철수는 유력한 대권주자였다. 당시 대선 전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1위를 달렸고 그 뒤를 무소속인 안철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차례로 잇고 있었다.
그러나 대선을 약 한 달 앞두고 문 후보가 안철수를 역전해 지지율에서 조금씩 앞서나갔고 안철수는 2012년 11월2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안철수는 정권교체를 위해 문재인 후보에게 전격 양보한다고 밝혔는데 단일화 과정에서 문 후보 측과 여러 마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장 양보
2011년 9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나오면서 화제가 됐다.
이전에 정치입문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정해왔던 안철수의 입장도 애매하게 바뀐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품게 됐다.
안철수는 당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현 집권 세력이 역사를 거스르고 있으며,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결정을 내리진 않을 것”이라며 “이를 위하여 내가 출마할 경우 야권 단일화에 참여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해야 하는지,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서울대 융합대학원 원장직을 그만두게 되면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지, 정치를 한다면 10년 정도는 꾸준히 해야할 텐데 자신이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철수는 결국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기로 발표하면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였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사실상 양보했다. 박원순 후보는 정몽준 후보를 꺾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무릎팍 도사’ 출연
안철수가 대중적인 관심을 크게 받기 시작한 것은 2009년 6월 MBC 예능프로그램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면서부터다.
‘무릎팍 도사 안철수 편’은 16.6%의 높은 전국시청률을 보였고 이를 계기로 안철수는 하루아침 사이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안철수는 당시 정치에 입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안철수는 이후 2010년~2011년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 연합클리닉 원장과 함께 대학을 돌며 ‘지방대학 기 살리기’강연에 나섰다. 이를 본 법륜스님이 청춘콘서트를 열자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여 대중과의 소통을 늘리면 젊은이들의 ‘멘토’이미지를 확실하게 굳혔다.
청춘콘서트 열풍으로 인지도가 높아지고 젊은층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되자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뜻을 보였다. 그러나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출마를 양보하고 단일화를 발표했다.
△안철수연구소 설립
1995년 3월15일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다.
안철수는 사업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스스로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고 알려졌다.
1997년 세계적 보안솔루션 업체인 미국의 맥아피(Mcafee)로부터 ‘1천만 달러’에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다.
안철수는 “회사를 매각한다면 그 후에 직원들이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또한 한국의 백신이 맥아피같은 해외 업체에 의해 장악당하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1999년 CIH(체르노빌)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백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안철수연구소는 흑자전환했다. CIH 바이러스로 인해 30만대 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되어 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수천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는데 백신 관심도 급증했다.
이후 안철수연구소의 매출은 계속 늘어나 1999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 원을 넘었고 이후 세후 순익 100억 원은 안철수연구소가 최초로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