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당선
문재인은 2017년 5월9일 19대 대통령선거에서 투표마감 직후 발표된 모든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 40%대 득표로 당선이 확실시됐다. 개표 결과 41.1% 의 득표로 2위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역대 최대인 17.7%포인트의 득표율차이를 보이며 당선이 결정됐다.
문재인은 오후 8시 투표가 마감되자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에 들러 개표상황을 잠시 지켜보고 선거운동캠프 인사들과 축하를 나눴다. 이후 광화문 세월호 광장으로 옮겨 안산에서 온 세월호 유족들을 만났다.
문재인은 "이번 승리는 정권교체를 향한 국민의 간절한 염원의 승리"라며 "지역을 뛰어넘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히고 개혁의 과제를 차질없이 수행해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 창출 공약
문재인은 2017년 3월 공공부문에 일자리 81만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문재인은 “작은정부가 좋다는 미신을 끝내고 정부가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야 한다”며 “국민의 생활 안정, 의료, 교육, 보육, 복지 등을 책임지는 소방관, 경찰, 교사, 복지공무원의 일자리를 당장 만들어내겠다”고 말했다.
소방관 1만7천여 명 채용, 의무경찰을 폐지하고 정규경찰을 연간 1만6700명 신규충원, 사회복지공무원 25만 명 등 구체적인 숫자도 제시했다.
문재인 측은 “81만 개 일자리를 창출할 경우 이미 매년 쓰고 있는 일자리 예산 16조~17조원 외에 매년 4조~5조원씩 5년간 21조5050억 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공약은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으로부터 각종 수당과 임금 인상분, 연금, 비용 등에 대한 재원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문 후보의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 공약에서 인건비 외에 제반시설 예산이 빠져있다”고 지적했고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후보는 “81만개를 만드는 데 5년간 4조2천억 원이 든다. 그것을 나누면 월 40만 원짜리 일자리를 81만개 만드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학계 등에서도 공무원 추가 채용에 따른 문재인 측의 장기적 비용 추계가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언론매체가 학계와 연구기관 등 전문가 100명(응답률 72%)을 대상으로 문재인, 안철수의 주요공약을 놓고 설문조사한 결과 ‘공공분야 일자리 81만개 창출’은 가장 ‘나쁜 공약’으로 뽑히기도 했다.
△사드 배치 관련 입장
문재인은 본래 사드배치에 반대했다가 '전략적 모호성'을 들어 사드배치의 찬반 표명을 유보했다.
문재인은 2017년 3월16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한미 간 합의가 있는데 사드 배치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는 쉽지 않다”며 “오히려 ‘전략적인 모호성’을 필요한 순간까지 유지할 필요도 있는 것이 외교”라고 말했다.
또 다음 정부에서 사드배치를 재검토하되 차기 정부가 사드를 배치하기 전에 ‘국회비준동의 절차’를 거쳐야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측은 4월14일 사전에 10대 공약을 발표하면서 사드배치에 대한 ‘국회비준동의’ 추진을 약속했으나 사흘만인 4월17일 유권자들에게 공개한 10대 공약 최종본에는 이를 빼는 등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7년 4월26일 주한미군이 26일 새벽 경북 성주골프장에 X-밴드 레이더와 차량형 발사대, 요격미사일 등 사드 핵심장비를 반입하자 문재인 측은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며 “이제라도 이동배치를 중단하고 차기정부에서 최종 결정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2017년 4월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배치 비용으로 10억 달러(1조1300억 원)를 부담해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대선후보들 간의 사드배치 공방이 재점화됐다.
사드배치를 차기 정부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해온 문재인은 ‘사드 찬성파’ 후보들이 트럼프의 비용 언급에 빌미를 줬다고 주장했다.
문재인은 4월30일 충남 공주대 앞에서 한 유세에서 “한국에서 주요 정당 대통령 후보라는 분들이 '국회비준 필요 없다', '무조건 찬성해야 한다'고 하니 '그러면 돈도 내라'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그는 “저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일관되게 '지금 찬반을 결정해서는 안 되고 새 정부로 넘겨 미국과 협상할 카드로 갖고 있어야 한다', '새 정부가 외교로 해결할 자신이 있다'고 주장해왔다”며 “새 정부가 결정하고 국비 비준 동의를 거쳐야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돈 요구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미국이 비용을 부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방어막을 치는 동시에 만일 비용을 실제로 요구한다면 국회 비준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미국 셰일가스 수입으로 이 비용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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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문재인 19대 대통령](https://www.businesspost.co.kr/news/photo/201705/48804_67151_456.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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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 대통령이 제18대 대선 출구조사가 발표된 2017년 5월9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 마련된 더불어민주당 선거상황실을 찾아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
△ 박근혜 게이트와 대선후보 문재인
문재인은 2016년 하반기 박근혜 게이트가 빚어낸 긴박한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대선후보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2016년 11월 박근혜 게이트 정국에서 처음에는 신중론을 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 당내 2~3위권 대선후보들이 명확하게 탄핵을 요구하는 반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한동안 지켰다.
그러나 2016년 11월15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운동에 나서겠다며 강경노선으로 전환했다. 2016년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2017년 3월10일 파면이 선고되는 과정에서 가장 수혜를 입은 후보로 평가됐다.
문재인의 대선후보 지지율은 2016년 11월에 20%대 초반이었는데 2017년 2월 초에 30%를 넘어선 뒤 3월 말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선두를 지켰다. 문재인이 제1야당의 주요 대선주자인 점과 원칙주의적 성향을 보여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척점으로 평가된 점 등 덕분에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정치권은 바라봤다.
2017년 4월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해 호남권, 충청권, 영남권, 수도권강원제주 등 네차례 실시된 권역별 순회경선에서 누적득표율 57.0%를 차지해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을 제치고 결선투표없이 본선으로 직행하면서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 당대표 문재인과 인재영입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시절 당내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친노’의 한계를 보여줬다고 지적됐다. 그러나 인재영입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1당으로 올라서는 데 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6개월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 너무 빨리 정치일선에 복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나왔다.
야권 정치인으로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10.4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세월호 참사 정국 등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박근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문재인은 2015년 2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후보를 제치고 대표에 올랐다. 이때 박지원 후보에 고작 3%포인트만 앞섰을 정도로 당내 장악에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친노-비노 갈등이 불거지며 독선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문재인과 안철수 의원의 대립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분열하자 비주류의 사퇴론에 직면했다.
2015년 12월28일 당이름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꿨다. 2016년 1월27일 대표에서 물러났다.
2015년 12월부터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외부인사를 영입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16년 4월 총선에서 123석을 얻어 새누리당을 제치고 원내1당에 올랐다. 당시 문재인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 이수혁 전 국정원 1차장,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김병기 전 국정원 인사처장,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서형수 전 한겨레 사장, 박주민 전 민변 사무차장 등을 더불민주당에 영입했다.
이 가운데 표창원 김병관 박주민 조응천 김병기 이철희 서형수 의원 등이 2016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 열풍을 이끌며 20대 국회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조응천 의원은 청와대에서 퇴직한 뒤 아내의 식당에서 일하던 시절 문재인이 그를 영입하러 찾아왔을 때 몇번이나 거절했는데도 ‘눈만 껌뻑 껌뻑거리며 도와달라던’ 문재인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결국 정치에 입문했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2016년 1월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멘토’로 불렸던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김종인 위원장을 영입하면서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도 민주당의 총선 승리에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재인과 김종인 전 위원장은 그 뒤 관계가 악화됐다. 김 전 위원장이 총선에서 공천 전권을 행사하고 문재인이 고립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총선 이후에도 총선승리의 공로 평가, 당대표 합의추대, 야권연대 등에서 시각차를 나타냈다. 결국 김 전 위원장은 2017년 3월8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 18대 대선 패배
문재인은 18대 대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다. 지지율 조사에서 오차범위 안의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당선에 실패했다.
2012년 4월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8월25일부터 9월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선출됐다.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 뒤 사퇴하는 등 범야권의 지지를 얻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지지율에서 다소 밀렸지만 당시 여론이 좌우로 사실상 양분되면서 대선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문재인의 지지율이 올랐다.
그러나 2012년 12월19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약 100만 표 차이로 졌다. 당시 문재인은 1469만 표(48.0%)를 얻었는데 이는 탈락후보 사상 최다 득표이자 역대 대선후보들 가운데 두번째로 많은 득표다.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요인으로 독자적 리더십을 세우는 데 실패해 국민들에게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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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문재인 19대 대통령](https://www.businesspost.co.kr/news/photo/201705/48804_67147_229.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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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하는 모습. |
△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
문재인은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법조계 동업자로서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문재인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했을 때 ‘법률가는 억울한 서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앤장 등 대형로펌의 영입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다면 노모를 모실 수 있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해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김광일 노무현 변호사 등과 함께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에 변호인을 맡은 것으로 언론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부산에 1982년 내려왔고 부림사건은 그 전의 일이다.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87년 대우조선 사건으로 노 변호사가 구속되자 문재인은 부산지역 변호사를 동원해 변호인단을 만들어 그를 변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권에 인도한 장본인이다.
1988년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참여 요청을 받은 그는 "정치인 자질은 노무현씨가 훨씬 더 탁월하다"며 노무현 변호사를 추천했고 노무현 변호사는 이를 거듭 피하다 결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는데도 “나는 참모용이고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으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변호사 업무에 복귀할 뜻을 여러차례 밝혔다.
그러나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자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고 하자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 제의를 수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흔들릴 때마다 문재인이 "정치를 끝까지 계속해 달라"고 애걸 반 압박 반으로 주문했던 만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이때 치아가 10개나 빠져 임플란트를 하면서 발음이 안 좋아졌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위기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2007년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에서 '왕수석',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으로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국정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한 뒤 장례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다. 그 뒤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 사법시험 합격과 사법연수원 시절
사법시험에 한차례 재수한 끝에 1980년 차석으로 합격해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문재인은 10대 시절 역사학자를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을 감안해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1978년 2월에 제대한 직후 아버지 문용형씨가 59세로 별세하자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아버지에게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시위 참가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다가 2차 합격소식을 들었다.
1980년 사법시험 3차 면접시험을 볼 때 안전기획부 요원으로부터 지금도 옛날에 시위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는지 질문받자 “지금도 변함없다”고 대답했다. 최종적으로 합격했지만 훗날 원하던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고승덕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김용덕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수료했다. 원래 성적은 수석이었으나 시위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