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 김원규 NH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

형님 리더십, 내부 신망 두터운 덕장 [2020년]
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 2016-07-06 00: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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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김원규 NH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
▲ 김원규 NH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


김원규는 1960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대구상고와 경북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LG투자증권에 입사해 최연소 지점장 기록을 세웠다.

우리투자증권으로 이름이 바뀐 뒤 퇴직연금영업담당, 연금신탁영업담당, WM영업1본부장 등 영업부문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면서 ‘영업통’으로 자리잡았다.

우리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을 맡다가 NH농협증권과 우리투자증권이 합병해 만들어진 NH투자증권의 초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2019년 3월부터 이베스트투자증권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우리투자증권 최연소 지점장의 주인공이다. 35세에 포항지점을 맡았는데 비결에 대해“어릴 때부터 회사가 내 것이라고 생각한게 남다르다면 남다른 점”이라고 대답했다.

우리투자증권 창사 이래 최초로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올랐다.

1999년 대우사태와 2004년 LG카드 사태가 터졌을 때 법인 영업을 맡고 있었는데 고객을 한명 한명 다 찾아가 당시 상황에 대해 진정성 있게 설명하며 고객과 회사 사이의 이해의 폭을 넓혔다. 대규모 손실로 힘들어하던 고객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해 더욱 두터운 신뢰를 쌓은 것으로 전해졌다.

WM사업부 대표 시절 증권사형 개인자산관리(PB)모델을 구축했다. 2011년 메릴린치 서울사무소 PB조직을 흡수해 프리미어블루 강북센터를 출범했고 씨티형 PB, 증권형 PB 등 PB영업모델을 접목해 각 지역별로 특화된 전략을 구사했다.

30년 넘게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며 쌓은 증권업 전반에 관한 전문성과 회사의 강·약점을 꿰뚫고 있는 점, 사내외 풍부한 네트워크 등이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증권업계에서 대표적인 덕장으로 꼽힌다. 격식이나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함과 인간적 친밀함으로 후배 직원들을 대해 회사 내부에서의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투자증권 시절 당시 조직의 핵심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투자증권의 종합자산관리브랜드 ‘옥토’를 탄생켜 대표적 브랜드로 키워냈고 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프리미어블루’를 선보였으며 메릴린치 PB부문 인수 등을 성사했다.

우리투자증권이 매각절차를 밟고 있던 2013년 7월 취임식에서 “우리투자증권의 가치를 높여 팔릴만한 좋은 물건으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뒤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는데 곧바로 나서 본사 8개 사업부를 5개로 줄이고 지역본부도 7개에서 5개로 축소했다. 반면 수익성이 좋은 투자은행(IB)와 법인영업 등의 사업부는 확대하면서 내실을 키웠다.

우리투자증권 사장에 취임한 이후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조직 분위기를 잘 추슬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직원들에게 ‘큰형님’으로 통한다. 전무 시절 1~3년차의 새내기 사원들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전화해 “집 앞으로 갈 테니 술을 사달라”고 했던 사건도 있었다. 김원규는 새벽까지 이들과 어울린 뒤 직원들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고 한다.

우리투자증권 한 임원은 “많은 부하 직원들이 믿고 따르는 선배”라고 평가했다. 우리투자증권 사장 취임식 당시 한 간부는 “평소 형님으로 모시던 분을 사장으로 부르려니 어색하다”며 건배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우리투자증권 사장에 취임할 당시 지향하는 최고경영자(CEO)의 자세로 ‘단료투천(簞?投川)’의 자세를 강조했다. 이는 장수가 귀한 막걸리를 하사받았지만 부하들을 두고 혼자 마실 수 없어 고심하던 끝에 강에 막걸리를 풀어 군사들과 함께 마셨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최고경영자(CEO)로서 임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한 것이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5년 LG증권에 입사했다.

LG증권 최연소 포항지점 지점장(35세)에 올랐고 금융상품영업팀 팀장을 지냈다.

2005년 4월 우리투자증권 상무보로 승진한 뒤 중부지역본부장·강남지역본부장·퇴직연금영업담당 등을 지냈다.

2008년 우리투자증권 연금신탁영업담당 상무로 승진한 뒤 퇴직연금그룹장, WM영업1본부장 등을 맡았다.

2010년 전무로 승진해 WM사업부 대표, 홀세일사업부 대표 등을 역임했다.

2013년 7월 우리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2015년 1월 NH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다. NH투자증권은 NH농협금융지주가 2014년 인수한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이 합병해 출범한 회사다.

2018년 3월 NH투자증권 대표에서 물러났다.

◆ 학력

1979년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 경북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이 동생이다.

◆ 상훈

◆ 상훈

어록


“NH투자증권은 농협금융이란 울타리 속에 들어온 이후 다양한 계열사끼리 시너지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범농협 전반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올해도 WM, IB, 자산운용 부문의 경쟁 우위 역량을 최대한 활용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겠다” (2016/01/07 매경증권대상 공로상을 수상한 뒤)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지만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의 통합과정에서 전 직원이 보여준 화합의 정신과 노고에 대한 격려로 받아들이겠다. 통합 출범 1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성과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질적인 조직문화와 시스템을 극복하고 물리적·화학적 통합에 한 발 다가선 일이었다. 각자의 입장이 달랐겠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포용해준 전 임직원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2016/01/07 매경증권대상 공로상을 수상하며)

“자본자율화 일정이 1985년 1월에 발표됐다. 이를 보고 (증권회사에) 들어왔는데 현실은 심부름에 지나지 않았다. 1, 3, 5, 7, 9년마다 회의가 들었다. 이런 걸 하러 온 것이 아닌데 했지만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2014/08/04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시장의 선택을 받는 회사가 되기 위해서 사업모델, 조직과 인사 분야의 혁신을 통해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 금융투자업의 본질은 고객에게 최적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고객의 성공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언제나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고객의 가치다” (2013/07/09 우리투자증권 사장 취임식에서)

◆ 평가

우리투자증권 최연소 지점장의 주인공이다. 35세에 포항지점을 맡았는데 비결에 대해“어릴 때부터 회사가 내 것이라고 생각한게 남다르다면 남다른 점”이라고 대답했다.

우리투자증권 창사 이래 최초로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올랐다.

1999년 대우사태와 2004년 LG카드 사태가 터졌을 때 법인 영업을 맡고 있었는데 고객을 한명 한명 다 찾아가 당시 상황에 대해 진정성 있게 설명하며 고객과 회사 사이의 이해의 폭을 넓혔다. 대규모 손실로 힘들어하던 고객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해 더욱 두터운 신뢰를 쌓은 것으로 전해졌다.

WM사업부 대표 시절 증권사형 개인자산관리(PB)모델을 구축했다. 2011년 메릴린치 서울사무소 PB조직을 흡수해 프리미어블루 강북센터를 출범했고 씨티형 PB, 증권형 PB 등 PB영업모델을 접목해 각 지역별로 특화된 전략을 구사했다.

30년 넘게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며 쌓은 증권업 전반에 관한 전문성과 회사의 강·약점을 꿰뚫고 있는 점, 사내외 풍부한 네트워크 등이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증권업계에서 대표적인 덕장으로 꼽힌다. 격식이나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함과 인간적 친밀함으로 후배 직원들을 대해 회사 내부에서의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투자증권 시절 당시 조직의 핵심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투자증권의 종합자산관리브랜드 ‘옥토’를 탄생켜 대표적 브랜드로 키워냈고 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프리미어블루’를 선보였으며 메릴린치 PB부문 인수 등을 성사했다.

우리투자증권이 매각절차를 밟고 있던 2013년 7월 취임식에서 “우리투자증권의 가치를 높여 팔릴만한 좋은 물건으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뒤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는데 곧바로 나서 본사 8개 사업부를 5개로 줄이고 지역본부도 7개에서 5개로 축소했다. 반면 수익성이 좋은 투자은행(IB)와 법인영업 등의 사업부는 확대하면서 내실을 키웠다.

우리투자증권 사장에 취임한 이후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조직 분위기를 잘 추슬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직원들에게 ‘큰형님’으로 통한다. 전무 시절 1~3년차의 새내기 사원들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전화해 “집 앞으로 갈 테니 술을 사달라”고 했던 사건도 있었다. 김원규는 새벽까지 이들과 어울린 뒤 직원들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고 한다.

우리투자증권 한 임원은 “많은 부하 직원들이 믿고 따르는 선배”라고 평가했다. 우리투자증권 사장 취임식 당시 한 간부는 “평소 형님으로 모시던 분을 사장으로 부르려니 어색하다”며 건배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우리투자증권 사장에 취임할 당시 지향하는 최고경영자(CEO)의 자세로 ‘단료투천(簞?投川)’의 자세를 강조했다. 이는 장수가 귀한 막걸리를 하사받았지만 부하들을 두고 혼자 마실 수 없어 고심하던 끝에 강에 막걸리를 풀어 군사들과 함께 마셨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최고경영자(CEO)로서 임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한 것이다.

◆ 기타

어렸을 때 가세가 기울자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낮에는 증권사 사환으로 일하며 대구상업고등학교 야간을 다녔다. 이 때 나이가 어리다고 받아주는 곳이 없어 동네 어른의 힘을 빌려 태어난 해를 1961년에서 1960년으로 고쳤다.

누나가 공무원으로 취직하면서 살림이 나아지자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그 뒤 1년3개월 동안 방바닥에 눕지 않고 독하게 공부했다는 일화가 증권가에 회자된다.

김원규는 이 시기를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라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부터 이듬해 예비고사를 보는 11월까지 1년3개월 동안 하루도 방바닥에서 잠을 잔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동생인 김재원 전 새누리당 의원이 과거 한 지역 언론에 “형이 LG증권에 갓 입사한 뒤 대학생이던 나를 위해 카드 돌려막기를 하면서 학비를 줬다”며 “형이 지방대를 나와 맨주먹으로 열심히 살아 성공한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한다”는 기고문을 썼다.

2016년 신년사에서는 ‘갑견이병 부득이위강(甲堅利兵 不得以爲强)’을 언급했다. 이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갑옷의 견고함은 병사를 이롭게 하지만 강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전쟁은 무기가 아니라 투혼으로 치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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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
마.....살아있네...
   (2019-10-09 20:5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