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문화프리즘] 뺄셈, 인생을 대하는 어느 중국인의 자세

▲ 크게 보면 뺄셈의 연속이지만 그 중간에 덧셈도 있었다. 물론 뺄셈은 컸고 덧셈은 작았다. 그래서 늘 적자였다. 그는 삶의 작은 행복에 기뻐하고 그 행복을 기억하는 것이 그가 큰 불행을 견디는 힘이었다. 사진은 영화 인생 포스터.

[비즈니스포스트] 한 해를 다시 시작했다. 새로운 다짐을 하고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우리는 대개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하며 산다. 좋은 날은 다가올 미래에 있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날이 올 거로 생각한다. 그래야 사는 맛이 있고 살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기대나 희망과 다르게 살다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한없이 힘들고, 앞이 깜깜하고, 치욕스러운 시간이 우리 앞에 닥칠 때가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 했기에 하늘이 내게 이런 힘든 시간, 이런 시련을 주는가 싶을 때가 있다. 

인생이 계속 지금보다 나아지는 덧셈의 연속이기를 기대하지만 사실 그런 인생이란 없다. 인생이 뺄셈의 연속일 수도 있다. 

삶을 살아갈 때 희망과 꿈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명처럼 닥친 고난과 좌절, 치욕의 시간 앞에서 삶을 잘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 덧셈의 시간을 잘 사는 것보다 뺄셈의 시간을 잘 사는 게 삶에서 더 중요할 수 있다. 소중한 나의 삶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그렇다.

인생이 온통 뺄셈의 과정이지만 그런 인생을 담담하게 바라보면서 원망하기보다는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 중국인들이 중국인의 삶의 철학을 상징하는 사람이자 중국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중국 소설가인 위화(余華)의 소설 ‘인생’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장이모 감독이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주인공 이름은 한자로 부귀(富貴)다. 그의 부모님이 부귀의 삶을 살라는 기대와 희망을 담아서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부유함도 잃고 귀함도 잃어가는 과정이다. 노름으로 집도 재산도 날리고 화병으로 아버지도 죽는다. 어느 날 갑자기 고열에 시달린 뒤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딸은 나중에 결혼하지만 출산하다가 과다 출혈로 죽는다. 아들은 남을 위해서 피를 뽑아주다가 죽는다.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위는 콘크리트에 깔려 죽고 외손주는 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다. 아내도 고된 일에 몸이 축나서 죽는다. 돈도 잃고 가족도 잃고 그는 혼자 남는다. 

이 사람도 닭이 자라서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서 양이 되고 양이 자라서 소가 돼 돈을 많이 벌게 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산다. 우리처럼 그렇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런 그의 덧셈 인생 기대를 저버린 채 뺄셈의 연속이다. 

인생이 이렇게 힘들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해서 이런 시련을 겪는지 원망이 들 수 있다. 젊었을 때 한때 노름을 했다고 하늘이 내게 이렇게 모진 시련을 내리는지 원망이 들고 억울할 수 있다. 

나보다 더 나쁜 짓 한 사람은 더 잘살고 그 집 가족은 다들 잘사는데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이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잇달아 닥치는지 화가 날 수 있다. 이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소설 속 이 사람은 이런 마음이 아니다.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소설보다 영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인생 뺄셈의 시간, 치욕과 고난의 시간에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 이 남자 인생을 복기하면서 그의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보자. 

인생에서 가족을 잃는 것보다도 더 큰 슬픔은 없으니까 그의 삶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인 게 맞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이런 큰 뺄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뺄셈과 함께 덧셈도 있었다. 좋은 아내를 맞았고 두 아이가 태어났다. 전쟁에 끌려갔다가 살아서 돌아와 가족과 다시 만나기도 했다. 딸이 말을 잃었지만 사위를 맞기도 했다. 몸이 약간 불편한 사위였지만 집도 고쳐주고 그의 삶에 따뜻한 기운을 가져다주었다. 딸이 아이를 낳다 죽었지만 귀여운 손주를 남겨주기도 했다. 

크게 보면 뺄셈의 연속이지만 그 중간에 덧셈도 있었다. 물론 뺄셈은 컸고 덧셈은 작았다. 그래서 늘 적자였다. 

그런데 행복학 전문가들이 말하지 않는가? 인생 행복을 위해서는 인생에서 한두 차례 크기가 큰 행복을 겪는 것보다는 그것보다 크기는 작아도 작은 행복을 여러 차례 겪는 게 더 낫다고. 이 남자가 그렇다. 그는 삶의 작은 행복에 기뻐하고 그 행복을 기억하는 것이 그가 큰 불행을 견디는 힘이었다.

그런데 소설과 영화 속 이 남자를 많은 중국인이 진정한 중국인이자 중국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꼽는 이유는 이런 행복학 교과서 차원을 넘는다. 

중국인의 삶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고사성어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어느 날 뜻밖에 생긴 말이 행운을 가져오기도 하고 불행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연히 말이 생긴 것은 행운. 그 말을 타다가 아들이 다치는 것은 불행. 다쳐서 아들이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었으니까 이건 또 행운이다. 

인생이란 이렇게 행운과 불행의 교차다. 인생에서 좋기만 한 일도 없고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그것은 마치 달과 같다. 달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처럼 행운과 불행은 늘 인생이란 하나의 원에 같이 있고 다만 어느 순간 밝은 면이 커지기도 하고 어두운 면이 커지기도 할 뿐이다. 

그러니 인생 행운의 시간에 자만하거나 도취하지 말 것이며 불행의 시간에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것이 새옹지마 고사의 교훈이다.

이런 인생 태도, 인간 삶은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작용하기 마련이라는 숙명론의 일종이다. “인생 원래 그래”, “세상 원래 그래” 이런 태도이다. 

운명과 싸우면서 삶을 개척해 가는 영웅 정신이나 신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 어둠과 정의롭지 못한 것을 남김없이 제거하여 광명의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개척 정신과는 다른 인생 태도다. 희망하고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유교적 인생관하고도 다르다. 

다분히 불교적이고 도가적인 인생관이다. 이런 중국인의 인생관, 소극적이고 부정적일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에 더구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 환경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적응하고 수용하는 태도여서 그렇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는 중국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국인과 비교하면 이런 중국인이 지닌 이런 장점이 한국인에게는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이런 단점은 중국인에게는 많지만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적다.

한국과 중국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라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두 나라 사람들이 삶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들여다보면 매우 다르다. 

우리는 유교 중에서도 신유학이라고 부르는 주자학적 태도가 강하다. 여기에 근대 이후 기독교적 세계관에 많이 동화됐다. 

그런데 중국인에게 유교는 정치와 통치의 원리일 뿐이다. 우리처럼 주자학 독존도 아니다. 우리는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다. 

일상에서도 중국인의 삶에는 불교, 도교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인생을 대하는 인생의 고난과 불행을 대하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차이가 여기서 생긴다. 

불행과 고난, 치욕의 시간이 없는 인생은 없다. 새해, 혹시라도 그런 시간 속에 삶이 놓일 때 삶을 대하는 주자학적, 기독교적 지혜만이 아니라 불교적, 도교적 지혜를 새옹지마의 지혜를 생각하면서 잘 버티자. 혹시 꺾이더라도 생을 포기하지 말고! 이욱연 서강대 교수
 
현재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사범대학교 대학원 고급 진수과정을 수료했고 하버드대학교 페어뱅크 중국연구소 방문교수를 지냈다. 중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며 여러 권의 책을 냈고 jtbc '차이나는 클래스', EBS '내일을 여는 인문학'에 출연하는 등 대중과 소통에도 활발하게 나서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욱연의 중국 수업',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이만큼 가까운 중국',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 지성'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 '들풀', '광인일기',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아큐정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