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와 경제] 세종시·계룡대와 백제 사비성, 금강이 만든 복된 땅들 (4)

▲ 정부세종청사 전경. <행정안전부 정부청사관리본부>

[비즈니스포스트] 금강과 갑천의 합류 지점에서 7킬로미터 정도 하류로 가면 금강이 약 250도 휘돌아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이 물굽이 안에 세종시 부강 일반 산업단지와 부용 농공단지가 있습니다.

여기 두 단지처럼 대강의 물굽이 안에 조성된 공업단지는 몇 개 안됩니다. 이곳은 큰 재물이 들어오는 명당이니 복된 터에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우리나라엔 강물이 크게 휘도는 물굽이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물굽이 안쪽 땅은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아 대규모 생산 시설을 갖춘 공장들이 입주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곳에는 부가가치가 높고 대규모 제조 시설이 필요 없는 IT 산업, 문화 컨텐츠 산업, 생명공학 산업, 첨단 기술 산업 등의 기업들을 유치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기업들이 입주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물굽이들의 복된 정기를 잘 활용하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격조 높은 고품격의 문화와 첨단 과학 기술 산업을 선도하는 나라가 되리라 봅니다.

물굽이 안쪽에 있는 터들은 물이 가깝기 때문에 재복을 빨리 받습니다. 빠르면 1~2년 안에 많은 재물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기대 이상 의외의 성과를 거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횡재라 할 만큼 깜짝 놀랄 정도의 큰 성공을 하는 기업들도 많이 생깁니다.

부강산단에서 하류로 7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금강과 미호강이 합류합니다. 미호강의 옛 이름 중 하나는 작천입니다.

갑천 유역을 우리나라에서 사람 살기 가장 좋은 곳으로 꼽은 이중환 선생은 두 번째로 살기 좋은 곳은 만경강 상류 율담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좋은 데는 바로 이 작천 유역이라 했습니다. 금강 지류에 가장 좋은 곳과 세 번째로 좋은 곳이 있는 것입니다.

금강과 미호강의 합류지점 일대에서부터 세종시 시가지가 시작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옛날부터 전해오는 도참서인 `삼한 산림비기`에 계룡산 아래 금강변에 참으로 매우 훌륭한 도읍지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참설을 믿는 많은 이들은 세종시를 삼한산림비기에 등장하는 `계룡산 아래 금강변의 도읍지`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종시와 계룡산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계룡산 주능선과 세종시 금강 사이의 거리는 12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금강은 세종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에서 계룡산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흐릅니다. 가장 가까운 곳이 7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계룡산 아래 금강변`을 `계룡산 아래와 금강변`으로 풀이합니다. 그리고 금강변은 지금의 세종시이고, 계룡산 아래는 이태조가 처음 도읍지로 삼으려 했고, 무학대사로 하여금 새 도읍 건설을 주관하게 했던 계룡산 남쪽의 신도안(지금의 계룡시 계룡대 일원)으로 봅니다.

계룡산의 도읍터를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이라고 아주 높이 극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금강이 발원지에서 서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경로가 태극 형상과 유사하고, 백두대간에서 계룡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인 금남정맥도 태극 형상 비슷합니다. 금강과 금남정맥이 가까이서 서로 호응하며 나란히 태극 형상으로 주행하여 산태극 수태극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종착지인 지리산까지 계속 남쪽 방향으로 주행합니다. 그런데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은 백두대간과 정반대로 북쪽 방향으로 주행합니다. 그래서 또 계룡산에 특별히 크고 장한 정기가 있다고 합니다. 

금강과 금남정맥이 짝을 이뤄 주행하듯 수태극의 명당과 산태극의 명당이 짝을 이룬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수태극 명당은 세종시이고, 산태극 명당은 계룡대 일원이라는 것입니다.

세종시는 여러 행정 부처가 입주한 행정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산태극 명당인 계룡대엔 3군본부가 있습니다. 세종시 정부청사 일대와 계룡대 일원이 짝을 이룬 한 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시 정부청사 일대는 산세가 약하고 금강의 수세가 강합니다. 경제, 문화 관련 행정 부처의 입지로 좋습니다. 각종 기업 본부의 입지로도 훌륭합니다.

국가 지도자가 일하는 집무실이나 관저의 입지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집무실과 관저 입지는 산세가 장한 곳이 좋습니다. 계룡산 신도안 계룡대 일원이 그런 곳입니다.

신도안의 형국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잇는데 제가 보기엔 상제봉조형의 명당입니다. 상제봉조란 하늘의 상제께서 신하들과 조회를 여는 것을 말합니다.

이곳의 주산은 계룡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입니다. 천황은 곧 하늘의 상제인데 천황봉의 형상도 상제형입니다. 또, 가까이에는 조정 대신 격인 산봉우리들이 단아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앞쪽으로 좀 더 먼 곳에는 백성 격인 산봉우리들이 겹겹으로 즐비하게 솟아올랐는데 그 모습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 뒤쪽에는 대둔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대둔산은 신도안의 조산(먼 앞 산)인데, 조산은 외국에 해당됩니다. 대둔산의 형상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중후합니다. 높이도 너무 높거나 낮지 않고 아주 적당합니다.

이렇게 주산이 웅장하고 사방의 산들도 기상이 장한데다 단아하고 수려하며 온화하니 나라의 지도자가 머물 터로서 참으로 빼어난 곳입니다. 그래서 삼한산림비기의 저자는 여기를 우리나라 최고의 도읍터로 꼽았던 것입니다. 또, 여기에 도읍을 세우면, 태평성대가 된다며 찬탄해마지 않았습니다.
 
[풍수지리와 경제] 세종시·계룡대와 백제 사비성, 금강이 만든 복된 땅들 (4)

▲ 백제 사비성을 방어하는 산성이 위치한 부소산 전경. <문화재청>

세종시에서 하류로 30킬로미터 정도 더 내려가면 금강에서 가장 큰 물굽이가 있습니다. 물굽이 안쪽 사람이 거주할 만한 땅은 면적이 6제곱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고수부지까지 합하면 8제곱 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이 물굽이 안에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이 있었습니다. 사비성 일대는 지금의 부여읍이 되었습니다.

금강 하구둑으로 바닷물을 막기 전까지 밀물 만조 때엔 서해 바닷물이 부여까지 올라왔습니다.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뒤, 백제는 금강의 큰 기운을 받아 활발한 해상 활동으로 많은 부를 쌓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또, 많은 백제인들이 왜국으로 건너가 왜국의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당시 왜국에 살던 이들은 대부분 기원전 4세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왜국으로 이주한 도래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가야계와 신라계, 고구려계 사람들도 있었지만 5세기 무렵부터는 백제계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당시 왜국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습니다. 구다라는 우리말로 큰 나라입니다. 당시 백제는 영토가 삼국 중에서 가장 작았고 특별히 강대한 국가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동생네 집 사람들이 형네 집을 큰댁이라 부릅니다. 백제계 사람들에겐 백제가 모국이자 본국이기 때문에 백제를 큰 나라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국은 백제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크게 발전했습니다.

사비성 터는 금강의 수세는 매우 장하고 훌륭한 데 비해 주산과 청룡 백호의 산세가 너무 약하고 큰 흠이 있습니다. 사비성 왕궁터의 주산인 부소산은 높이가 해발 95미터입니다. 대강인 금강에 걸맞지 않게 작고 낮습니다.

또 청룡이 있어야 할 동쪽 방향에는 왕궁터를 보호하는 산이 없습니다. 그냥 공허하게 비어 있어 여기로 왕궁터의 정기가 크게 흩어집니다. 백호 방향인 서쪽에도 가까이엔 산이 없습니다. 도읍지의 청룡 백호가 이러하면 외적의 침략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청룡과 백호는 부실하나 사비성의 조안(안산과 조산: 앞에 보이는 산)들의 형상은 빼어납니다. 가까이에는 예쁘고 아담하게 생긴 산들이 솟아 있고, 멀리에는 유장하고 수려한 산줄기들이 겹겹이 뻗어 있습니다.

비단폭 같은 금강과 수려한 산세가 어우러진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앞의 풍경이 이러하면 훌륭한 문화를 발전시키고 외국과도 문화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됩니다. 

주산과 청룡 백호의 산세가 약하고 흠이 커서 사비성 터는 한 나라의 도읍터로서 복덕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고 외적의 침략을 받기 쉽습니다.

백제는 시비로 천도한 지 122년만에 신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래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금강의 큰 정기를 받아 풍요를 누리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해줬습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