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70만km. 지구 17바퀴에 해당하는 거리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22년 5월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위원회' 민간위원장을 맡은 뒤 지난 11월29일 개최지 결정이 나기까지 유치활동을 위해 지구를 17번이나 돌았다.
 
[데스크리포트 12월] 재계가 부산 엑스포 위해 지구 197바퀴 꼭 돌아야 했나

▲ 2030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지구촌을 누빈 주요 기업인들.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최 회장은 유치전 막판까지 약 10일 동안에만도 2만2천km가량을 돌며 스퍼트를 올렸다. 최 회장은 개최지 투표권을 가진 각 나라의 요인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 했다. 이에 전용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입출국 허가에 시간이 걸릴 것을 우려해 일반 항공기의 이코노미석을 타기도 했다. 

최 회장을 비롯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 그룹의 오너경영인 뿐 아니라 주요 기업의 핵심 경영진들이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이동한 거리는 모두 790만km에 이른다. 이들이 이동한 거리는 지구 197바퀴에 해당한다. 

주요 기업인들이 들인 시간의 총량은 가늠하기조차도 힘들다. 

지정학적 위험이 커지고 강대국들의 자국 중심주의가 판을 치는 글로벌 정세 속에서도 기업인들은 윤석열정부의 국정과제인 엑스포 유치를 위해 아프리카와 태평양 도서 국가, 남미 등 글로벌 비즈니스와 크게 상관없는 지역까지도 샅샅이 누벼야 했다. 

당장 내일을 장담하기 힘든 엄혹한 환경 속에서 들였던 기업인들의 피 같은 시간이 엑스포 유치를 통해 국가브랜드 개선에 이어지지도 못한 채 결과적으로는 매몰 비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업인들로서는 너무나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물론 엑스포 유치전 초중반까지 정부로서는 일말의 기대를 해볼 수 있었다고 치자. 우리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밀린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고 2차 투표에서 역전을 노린다는 전략을 펼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사우디아라비아로 2030 엑스포 개최지가 굳어지고 있다는 관측이 점차 우세해졌다. 하반기 들어 이런 기류는 점점 더 강해졌다. 주요 기업 사이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충분히 감지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막판까지도 역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엑스포 유치를 위해 여러 나라를 잇달아 방문했고 여기에 주요 기업 총수들도 하는 수 없이 동행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119대 29의 참패였고 기업 활동에 도움이 되야 할 국가브랜드는 오히려 크게 손상됐다.

대통령에게 엑스포와 관련한 각국의 정세 보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의 오판과 불통 의혹 속에 주요 기업인들은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하며 일방적으로 본연의 업무에 투입해야 할 피 같은 시간을 써야 했다.

방문국가로부터 부산 엑스포 지지를 대가로 이런 저런 투자요구를 받는 부담까지 져가면서 말이다. 기업의 명운을 결정하는 총수와 핵심 경영진의 시간이 말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은 어마어마한 사회적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영국 매체 '디 아티클(The Article)'은 2030 엑스포 유치전 결과가 나오기 이틀 전에 지난 8월 열렸던 새만금 잼버리의 실패를 예로 들면서 "한국의 대규모 국제행사 관리 능력이 신뢰를 잃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 매체는 4만3천 명의 청소년도 관리하지 못한 한국이 28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모이는 엑스포를 제대로 치를지 의심하는 나라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무능한 면모를 보였던 정부가 추진했던 정치적 이벤트에 기업들은 자본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경영자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쏟아부어야 했다. 결국 이번 엑스포 유치 실패는 정부의 무능과 오판으로 기업 경영활동의 전략적 의사 결정에 엄청난 낭비가 있었던 일이었다고 결산할 수 있다. 

엑스포 유치전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행태가 바뀌지 않는다면 기업들은 이번에 쏟아부은 시간적 매몰비용 이상의 부담을 당분간 지고 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보수 성향의 정권은 친기업 정책을 표방하면서도 한편으론 기업을 정치적 이용 대상으로 삼았던 사례가 흔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서원(개명전 최순실)씨가 자신이 세운 미르·K스포츠 재단에 돈을 대라고 기업들에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 뒤 오너 경영인들은 재단에 돈을 대는 대신 부정한 청탁을 하고자 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재판 끝에 수감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기업들도 정경유착으로 이득을 본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투명해지면서 정경유착 분위기는 점차 옅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엑스포 유치전처럼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일방적으로 부응해야 하는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기업들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한편에선 정경유착의 유혹에 다시 빠질 수도 있다. 

물론 엑스포 유치는 국가 브랜드 제고에 도움이 되는 일로 비선 실세의 이익을 위한 재단 설립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업들도 시민의 일원이니 정부 정책에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협조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정부의 국정 과제에 주요 기업들이 이렇듯 일사분란하게 끌려다니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유치전 판세가 기운 뒤에도 밉보일까 말도 못 하고 정부에 일방적으로 휘둘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기업은 사업을 열심히 하도록 해 세금 많이 내고 고용을 늘리는 게 본연의 임무다. 나아가 사회에서 번 돈을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데 환원하는 일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정한 국정과제에 기업이 부응해야 한다는 의무는 그 어디에도 규정돼 있지 않다. 

논어 안연편에 보면 공자는 정치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답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현대 사회와 정치에 치환하면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정부의 일은 정부가, 기업의 일은 기업이 해야 한다.' 박창욱 산업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