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 레시피] 드라마 연인, 병자호란 감추고 싶은 역사를 안방으로 소환하다

▲ ‘연인’은 이렇게 낭만적인 로맨스물처럼 시작하지만 병자호란이 발발한 이후로는 본격적인 민중 수난사를 그려낸다. 처참한 몰골로 피난을 떠나는 백성들, 노예 생활을 하는 조선인 포로들, 겁탈 당해 이후 ‘환향녀’가 되는 여성들이 리얼하게 묘사된다. 사진은 연인 포스터.

[비즈니스포스트] 사극의 바람이 거세다. 최근 종영된 ‘연인’(MBC)과 현재 방영중인 ‘고려 거란 전쟁’(KBS2)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은 병자년 음력 12월에 발발하여 병자호란이라 불린다. 양력으로는 1637년 1월부터 2월까지 채 두 달이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기간 벌어진 전쟁이다. 

선조 25년(1592)에 시작되어 무려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에 비하면 기간도 짧고 조선 역사 상 처음으로 적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스러운 사실이 있어서인지 대중서사에서 크게 환영 받는 소재는 아니었다. 

한국영화사 목록을 보아도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가 병자호란 소재 영화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이 대중서사에서 활발히 소비되던 시대는 조선시대 후기로 ‘영웅소설’, ‘군담소설’이라는 장르로 등장한다. 

어린이 동화 전집에도 늘 등장하는 ‘박씨전’의 배경이 병자호란 시기이다. 주술에 걸려 추녀로 변한 박씨가 결혼해서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남편을 출세시키고 전쟁이 나자 직접 참전하여 도술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이야기다. 물론 주술이 풀려 절세미인으로 거듭 나는 해피엔딩이다. 

‘임경업전’, ‘유충렬전’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웅을 내세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민중을 위로하고 생생한 전쟁 활극을 펼쳐 통속적인 재미도 추구하는 작품들이다.
 
이후 소강상태로 있던 병자호란 소재 대중서사물의 재등장은 2010년 이후다. 그 시작은 ‘최종병기 활’(김한민, 2011)이다. 생소한 만주어 대사를 등장시키고, 청나라 장수들을 단순한 악의 무리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하는 서사 전략이 적중해 74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불과 3년 뒤 같은 감독이 연출한 ‘명량’(2014)이 세운 1760만 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과 비교하면 여전히 대중적 흡인력은 임진왜란이 크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남한산성’(황동혁, 2017)과 ‘올빼미’(안태진, 2022)는 이전 사극과는 결이 다른 작품들이다. 

압록강을 건넌 청의 기병이 파죽지세로 며칠 만에 서울 코앞까지 도착하자 인조는 부랴부랴 피난길에 올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남한산성’은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무르며 성을 포위한 적과 대치한 한 달 반 남짓한 시간을 그리고 있다. 

전투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청과 협상할 것이지 끝까지 항전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인물들의 일종의 심리극이다. 주화파(主和派)인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주전파(主戰派)인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식)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신념의 대결과 갈팡질팡하는 인조(박해일)의 우유부단함이 뒤엉킨 숨 막히는 공기를 포착한다.
 
‘올빼미’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의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시력을 거의 잃은 침술사(류준열)의 시점을 표현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어둡게 표현한 촬영이 돋보였던 영화다. 불안증에 사로잡혀 아들과 갈등하고 결국 아들까지 죽이는 인조(유해진)의 새로운 모습을 조명한 팩션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이제 드라마 ‘연인’으로 들어가 보자. ‘연인’은 이색적인 사극이다. 현재 방영 중인 ‘혼례대첩’(KBS2)처럼 퓨전 사극도 아니고 ‘고려 거란 전쟁’처럼 정통 사극 계열도 아니다. 같은 시기를 다루었지만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JTBC, 2013)은 전형적인 여인들의 궁중암투극 성격이 강했다. 

‘연인’은 퓨전 사극과 정통 사극이 혼합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빅터 플레밍, 1939)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랑에 휘말리는 남녀 4명의 사랑과 비극적 운명을 다루었다는 면에서 유사한 캐릭터와 플롯을 갖고 있다. 

특히 이장현(남궁민)과 유길채(안은진)가 티격태격하는 드라마 도입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와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가 벌이는 밀당과 유사하다.
 
‘연인’은 이렇게 낭만적인 로맨스물처럼 시작하지만 병자호란이 발발한 이후로는 본격적인 민중 수난사를 그려낸다. 처참한 몰골로 피난을 떠나는 백성들, 노예 생활을 하는 조선인 포로들, 겁탈 당해 이후 ‘환향녀’가 되는 여성들이 리얼하게 묘사된다. 

대중서사가 역사를 소환할 때는 정치적 무의식이 개입한다. 

1970년대 유신체제는 민족의 총화단결, 부국강병을 이끌어 낸 지도자로서 이순신 표상을 정립하였다.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한 병자호란이 최근 대중서사의 소재로 각광받는 이면에는 현재 우리의 정치적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사극을 통해 궁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