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거꾸로 가는 한국의 플라스틱 빨대 규제, 더 큰 해악은 사라진 신뢰

▲ 13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종이빨대 생존대책협의회'가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역행, 날벼락, 줄도산, 위기, 울분, 뒤통수.

15일 기준으로 ‘빨대’라는 열쇳말과 관련해 연일 국내 언론들의 기사 제목을 장식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환경부가 일회용품 규제 정책을 놓고 7일 플라스틱 빨대와 관련한 계도기간을 기존 올해 11월23일까지에서 무기한 연장하기로 발표한 데 따른 후폭풍이다.

환경부는 소상공인 부담 해소,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등을 이번 결정의 목적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계도기간 이후 본격적 규제가 예정돼 있던 만큼 이번 계도기간의 무기한 연장 조치는 사실상 당분간은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막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카페 등지에서 한동안 종이빨대 사용이 강제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종이빨대 반품, 주문 취소 등이 이어지고 있다. 생존에 위협을 느낀 종이빨대 제조기업들은 ‘종이빨대 생존대책협의회’를 조직해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 세계는 플라스틱 규제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중

환경부의 이번 결정은 정책 방향만 놓고 봐도 명백하게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조치일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 대응이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로 자리를 잡으면서 플라스틱 사용을 강제로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현재 케냐 나이로비에서는 13일부터 일주일 일정으로 유엔(UN) 주도로 플라스틱 협약을 위한 제3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3)가 열린다. 이번 3차 회의에서는 앞선 두 차례 회의를 통해 마련된 협약문 초안을 본격적으로 조율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플라스틱 협약은 내년 말 열릴 5차 회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될 예정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플라스틱 사용을 규제하는, 세계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지닌 규범의 등장이 이제 1년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심지어 5차 회의가 열릴 장소는 다른 곳도 아닌 한국의 부산이다.
 
[기자의눈] 거꾸로 가는 한국의 플라스틱 빨대 규제, 더 큰 해악은 사라진 신뢰

▲ 1일 서울 마포구 신촌역 앞 광장에서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플라스틱 괴물 의상 조형물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정책이 결과적으로 국내 경제와 기업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번 빨대 사례만 놓고 봐도 언젠가는 플라스틱 빨대 사용의 규제가 불가피한 만큼 다른 나라보다 앞서 종이빨대 등 대체품 관련 산업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의 마련을 고려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종이빨대 생존대책협의회는 13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시위를 하며 “이번 결정으로 판로가 막힌 종이빨대 제조업체가 줄도산하면 환경산업 전반이 무너질 것이고 나중에 다시 종이빨대를 사용하게 되더라도 수입산 종이빨대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생존 걸린 정책이 하루 아침에 바뀌어, 정부 정책 향한 신뢰는 어디로

종이빨대 생산기업에는 생존이 걸린 결정이었지만 정작 결정을 내린 환경부의 대응은 아직까지 미적지근해 보인다.

한화진 장관은 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관련 질문을 받자 “혼선에 대한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한다”, “플라스틱 빨대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고 종이빨대를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등 발언을 내놓았다.

환경부는 종이빨대 생존대책협의회 간담회를 열고 다음 주 중으로 지원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기업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기업 대표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전에도 정부를 믿고 생산라인을 확충하고 인력을 늘리는 등 투자를 받았다가 지금 도산 위기에 몰리게 됐다”, “정부를 또 믿어야 하냐”는 분위기다.
 
[기자의눈] 거꾸로 가는 한국의 플라스틱 빨대 규제, 더 큰 해악은 사라진 신뢰

▲ 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한화진 환경부 장관이 환경부가 7일 내놓은 일회용품 조치와 관련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업 대표들의 반응을 살펴보다 보니 환경부의 이번 결정이 가져올 부정적 효과는 단순히 빨대 산업에 그칠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정부 정책을 향한 ‘신뢰’가 깨어졌다. 표현 그대로 깨어진 것은 다시 짜맞추기 어렵다.

신뢰는 개인 사이 관계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정부의 정책이나 사회 전반에서 단순히 도의에 그치는 가치가 아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정부의 경쟁력은 그 사회가 지닌 신뢰수준에 의해 결정되며 신뢰 없는 사회는 경쟁력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에서 정부의 정책을 향한 신뢰가 깨어지면 당장 기후변화 대응과 같은 환경 정책은 물론 수시로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대응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국가 경쟁력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번 빨대 관련 결정을 보면 당장 경제성은 떨어지지만 미래 대비를 위해 국가적으로 필요한 산업에 누가 정부 말을 믿고 선뜻 투자하겠는가?

중국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에 실린 ‘이목지신(移木之信)’ 고사는 선진국의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가 정부를 향한 사회의 신뢰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준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 효공 때 재상인 상앙(商鞅)은 ‘법치’에 근거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백성들이 새로운 법과 정책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정책을 실시했는 데 도성 남문에 커다란 나무기둥을 놓고 ‘누구든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면 상금 십금(十金)을 준다’는 것이었다.

해야 하는 일에 비해 상금의 규모가 커 이를 믿지 못한 백성들이 선뜻 기둥을 옮기려 하지 않자 상앙은 상금을 다시 오십금(五十金)으로 올렸다. 상금의 규모가 더욱 커지자 누군가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무기둥을 옮겼고 상앙은 실제로 상금을 지불했다.

결국 나라의 법과 정책에 신뢰가 생겼고 상앙은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상앙의 개혁은 훗날 진나라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