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 마흔에 은퇴하다] 달라지는 명절문화, 명절증후군을 거부할게요

▲ 여성들만 명절음식, 제사음식 준비하고 치우느라 고생하는 구습이 명절증후군을 낳고 있다. <픽사베이>

[비즈니스포스트] 추석연휴 전후로 올라오는 기사의 내용이 달라졌다. 

어릴 때만 해도 홍동백서는 뭐고 귀경길 모습은 어떤지 보여주는 게 주였다. 하지만 이제는 ‘추석 이후 이혼율 높아져’, ‘제사 없는 명절을 원한다’, ‘젊은 층 절반이 집 콕 원해’, ‘추석연휴 해외여행 예약 순위는’ 등의 기사가 올라온다.

그런 기사 아래 달린 사람들의 반응은 더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네 조상들 제사 준비를 아내 며느리가 다 하나?”, “그렇게 제사가 소중하면 여성들이 안 한다고 할 때 남자들끼리 준비해서 지내라”, “정작 조상 덕 본 잘 사는 집은 해외여행 가는데 뭐 없는 집만 제사 그렇게 챙기더라” 등등 그동안 쌓인 억울함과 울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가부장적 문화, 남자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묻혔던 여성 구성원들의 목소리, 구습을 성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더 일찍부터 드러내고 풀었어야 할 갈등이 이제야 터져 나오는 중이라니 좀 뒤늦은 감도 있다.

고생하는 아내, 며느리 입장만 두드러지는 게 아니다. 젊은 층은 젊은 층대로 추석 고충이 있다. 명절에 모이는 친인척들의 매너 없는 질문 공세에 지치고, 별로 친해 보이지도 않는 인척이 명절이라고 꼭 모여서 먹고 놀다 싸우는 모습도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다. 

이 이상한 구습 지키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지는 거다. 과로 강요하는 한국의 일 문화에도 지쳤으니 연휴 동안 나를 돌보며 쉬고 싶다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해 갈 만한 이유 아닌가.

예전에는 이런 마음들을 ‘이기적인 소리, 철없는 소리’ 등으로 치부하며 억누르는 풍조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양성의 시대, 부당한 문화를 고발하고 바꾸려는 시대다. 인척들의 의미도 예전 같지 않고 갈등이 심한 가족이나 가족이 없는 가구도 있다. 

이런 개인의 의사, 개인의 사정을 반영한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하는 건 문제가 아니라 다행인 일이다. 드디어 명절 문화가 조금씩 21세기다워지려고 시동을 거는 중이다.

인척과 친하지 않은 집은 귀성객 붐비는 비효율적 이동 대신 쉬고 싶은 마음, 근거리에서 즐기고 싶은 마음을 따르는 게 더 효율적이고도 행복한 연휴 보내기가 될 것이다. 평소 부모나 인척과 사이가 좋은 집이라도 21세기와 맞지도 않는 구습, 제사 없이 모여서 여행 가고 외식 하는 게 편할 수 있다.

물가가 올라 명절 상차림이 힘들어진 것도 제사를 줄이거나 없애가는 한 원인이라고 한다. 명절 음식 먹는 걸 전처럼 학수고대하던 세대도 아니다.

내 세대만 해도 어릴 때 명절 음식은 모처럼만에 먹어보는 진수성찬이었다. 며칠씩 아이들이 먹느라 좋아하는 걸 보면 엄마들이 고생해도 참을 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 평소에도 잘 먹고 사는 시대고 음식 기호도 다양해졌다. 수북하게 만들어서 냉동실에 몇 달씩 쟁여 놓게 되는 제사음식은 더 이상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음식이 아닌 처치곤란인 집도 많다.

이렇게 문제가 이것저것 많은데도 예전과 똑같은 문화만 고집하는 집안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갈등이 커질밖에.
 
[워커홀릭, 마흔에 은퇴하다] 달라지는 명절문화, 명절증후군을 거부할게요

▲ 한국 상차림보다 훨씬 간편한 북미의 명절 상차림. 준비도 온가족이 함께 한다. <픽사베이>

마흔 은퇴 전 입시 논술 강사로 20년간 일했다. 수시 모집 입시철인 추석 연휴는 아침부터 밤까지 특강이 깔리는 입시특수였다. 연세대 등 주요대 논술이 추석 연휴 직후인 해가 많아서 학생들을 케어하려면 남들처럼 쉴 수 없었다. 그런데 나와 내 팀원들은 이 연휴 특강을 무척 좋아했다. 단지 수입이 늘어나는 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명절마다 인척들 싸우는 걸 보고 큰 사람으로서 그런 모임에서 빠지고 싶어서 좋아했다. 내 팀원들 다수가 결혼한 중년여성이었는데 그분들은 학원 특강이 불합리한 명절 문화에서 공식적으로 빠질 수 있는 카드라며 반겼다. 

‘에고, 못 가요, 너무 바뻐요’가 잘 통하도록 충분하게 큰 돈을 시모에게 드리느라 특강 수입이 큰 이득은 아니었다. 그래도 학원 강의와 학생케어가 명절 집안일보다는 더 낫다며 다들 하하호호 즐겁게 일하는 분위기였던 게 생각난다.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는 한국보다 남녀평등, 여성인권 신장 문화가 한 세대쯤 앞서간다. 유교 구습도 없다. 추석 격인 땡스기빙데이나 크리스마스 가족모임에서 한국 같은 갈등, 이혼율 증가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명절 가족모임에서는 보통 남편이 칠면조를 굽고 아내가 샐러드나 고구마, 감자 정도를 준비한다. 후식용 파이나 술은 손님이 사오는 경우가 많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에 맡기고 다 같이 후식을 먹으며 얘기하는 식이다. 

음식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게 다 그날에 쉽게 끝나는 편이라 한국식 명절증후군은 없다. 시부모가 며느리를 당연하게 종 부리듯 일시키고 남편도 맞장구치는 식은 상담 받아야할 문제적 행위고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집집마다 갈등도 있지만 한국처럼 이래라 저래라, 꼭 모여라 하는 의무나 억압이 덜하고 자기 의사 밝히기도 편한 문화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편한 명절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다 보면 그간 한국의 명절 문화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새삼 더 느끼게 된다. 요즘 들어 변화하곤 있지만 아직은 기 센 며느리, 기 센 젊은이들이 주위 비난을 감수하고 자기 의견을 펼쳐야 마지못해 변화가 먹히는 식인 점은 안타깝다. 

기 센 사람들이 기운을 쥐어 짜내서 호소하지 않아도 알아서 편한 명절이 되길 바랄 뿐이다. 캐나다홍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