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와 경제] 하회마을 정기, 애민사상과 공동체정신으로 피어나다 (4)

▲ 서애 류성룡 선생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하회마을로 돌아와 후학들을 지도하며 징비록을 집필하는데 전념했다. <하회마을 홈페이지>

[비즈니스포스트] 지난 회에 말씀드렸듯이, 류성룡 선생은 전란의 와중에 영의정이 되어, 부국강병과 민생 경제 회복을 위해 매우 개혁적인 정책들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작미법과 속오군제, 신분제를 넘어 서얼 출신이나 양민들을 등용하는 제도, 노비들도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면 면천시켜 주는 정책 등이었습니다. 이들 정책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파격적이었습니다. 

작미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던 공납의 폐해를 없애고자 만든 법입니다. 당시 각 지방 관아는 공납으로 거둔 특산물을 한양으로 운송하여 특산물의 품질을 검사받아야 했습니다.

이때 세금 징수 기관의 관리들이 온갖 트집을 잡아 불합격 시키고는, 자신들과 결탁한 상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특산물을 사서 납품하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관리들과 상인들이 막대한 이득을 얻었고, 지방의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 처음엔 각 지역의 특산물을 납부하게 했던 공납 제도가 세월이 흐르면서 아주 불합리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생산했으나, 당시는 생산하지 않는 물품을 납부하게 하거나, 한번도 생산한 적이 없는 물품들을 납부하게 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각 지방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공물을 사서 납품해야 했습니다. 관리들과 상인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특산물을 팔아 엄청난 이익을 취했습니다.

특산물을 사서 납부하는 것을 방납이라 합니다. 방납의 이권 규모가 막대해지니, 공납 관련 관리들뿐 만 아니라 지방 수령과 중앙의 관리들, 권세가들, 심지어 왕족들까지 방납 사업에 뛰어들어 이익을 챙겼습니다. 잘못된 공납제도 때문에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너무 막심헀습니다.

공납 제도의 불합리한 점은 또 있었습니다. 공납 의무는 모든 가구에 똑같이 부과됐습니다. 만석군 거부나 자기 땅이 한 평도 없는 소작인이나 같은 양의 특산물을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공물을 바치느라 굶주려야 했습니다.

이전에도 이런 폐단을 혁파하여 힘없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애썼던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율곡 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은 특산물 대신 쌀로 내게 하고, 토지 소유에 따라 공납의 양에 차등을 두는, 대공수미법을 제정하여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노력은 기득권 세력의 강경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율곡 선생의 대공수미법은 류성룡 선생에 의해 작미법이란 이름으로 부활했습니다.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방해는 여전했지만, 선생이 강력하게 추진하여 실행에 성공했습니다. 작미법의 시행으로 민생 경제가 개선되고 힘없는 백성들의 고통도 좀 더 가벼워졌습니다.

속오군 제도는 모든 국민에게 병역 의무를 지게 하는 국민 개병제와 같은 제도입니다. 속오군은 양반, 중인, 양인, 공사노비, 이렇게 모든 계층의 장정들로 구성된 지방군이었습니다.

그동안 군역에서 제외 됐던 양반들까지 병역 의무를 지게 했으니 매우 획기적인 제도였습니다. 이 또한 양반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심했지만, 선생은 강력하게 밀어붙여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 제도 실행 후 곧 이어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속오군은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공납의 양을 정하는 데 빈부 격차에 따라 공정하게 차등을 두고, 군역을 평등하게 부과한 선생의 업적은 힘없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극진한 애민 정신의 결실입니다. 또,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백성이 함께 사는 국가 공동체를 위해 다같이 공평하게 기여해야 한다는 공동체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인걸은 지령'이라 했습니다. 빼어난 사람은 땅의 신령한 기운으로 태어나고 길러진다는 말입니다. 빼어난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사람 뭇 생명이  땅의 정기로 태어나고 성장합니다. 그러니 하회마을의 뛰어난 정기가 선생의 극진한 애민 정신과 공정무사한 공동체 정신을 길러줬다고 봅니다.

하회마을의 특별한 분위기와 인간 관계도 선생의 애민 정신과 공동체 정신 함양에 지대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하회마을 터는 전에도 말씀드렸 듯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골고루 복을 받으며 화목하게 살 만한 복지입니다. 하회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만석군 같은 엄청난 부자는 얼마 안 나왔으나 다들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또, 엄격한 신분 제도에 의한 차별은 있었지만, 양반인 류씨 문중 사람들과 상민들과 하인들의 사이도 화목했습니다. 양반들이라 해서 상민과 하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양반들의 줄불놀이와 상민들의 하회 별신굿 놀이가 공존한 것은 화목한 마을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양반 류성룡 선생에겐 온 나라가 하회마을처럼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풍수지리와 경제] 하회마을 정기, 애민사상과 공동체정신으로 피어나다 (4)

▲ 하회 별신굿 놀이에 사용하는 탈을 쓰고 있는 사람들. <하회마을 홈페이지>

1598년 8월 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습니다. 이에 왜적들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참혹했던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명나라 장수 정응태란 자가 명나라 조정에 조선과 왜적이 합세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어이없는 모함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조정에선 그것이 모함임을 밝힐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해야 했고, 선조는 선생에게 그 임무를 맡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건강이 많이 안 좋은 데다 노모가 계셔 자신은 사신으로 가기 어렵고, 다른 누가 가도 그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며 선조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이 일을 빌미로 선생을 모함하며 탄핵하는 적대 세력의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상소가 올라오자 선생을 특별히 신임하던 선조도 결국 선생에게 삭탈관직이란 무거운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 날은 1598년 음력 11월19일이었으며, 또 바로 이날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두 분을 전쟁이 끝나가면서 같은 날 모두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은 모든 가족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권력 다툼과 시기, 모함과 탐욕으로 병든 한양 땅에 아무 미련이 없었기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표표히 떠났을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후학들을 지도하며 징비록을 집필하는데 전념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선생의 빈 자리는 매우 컸습니다. 2년 도 채 안 되어 선조는 선생을 복직시키고자 했습니다. 선생은 극구 사양하며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1604년 징비록 집필을 마쳤고, 1607년 6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의 부음이 한양에 알려지자, 1000여 명의 백성들이 선생이 살던 옛집 앞에 모여 슬피 통곡했다고 합니다. 조정에선 선생의 별세를 애도하기 위해 사흘 간 상가를 철시하게 했는데,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하루 더 연장해서 나흘 동안 철시했다고 합니다. 또 워낙 청빈하게 사신지라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많은 이들이 성금을 모아 장례를 치렀다고도 합니다.

선생이 떠난 뒤에도 하회마을 사람들은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큰 환란을 겪지 않고 유복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려왔습니다.

류종혜 선생이 처음 입향한 이후로는 600년이 넘게 그 복을 받았으니 하회마을은 참으로 빼어난 복지입니다. 우리나라엔 하회만큼은 아니어도, 거기 사는 이들 뿐 아니라, 세상에 많은 복을 나눠줄 만한 복지들이 많습니다. 다음 회부턴 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하회마을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매일 많은 외지인들이 잇달아 방문합니다. 여기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모두 하회의 복된 정기를 많이 받고, 류성룡 선생의 애민 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돌아간다면, 세상의 큰 복이 될 것입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