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태 시사 줌인] 천 년 교분 나눈 이란, 우리가 아껴야 할 또 하나의 시장

▲ 박진 외교부 장관이 9월4일 호세인 아미르-압둘라히안 이란 외무장관과 전화 통화로 이란 동결 자금 등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서울 밝은 달에
밤 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마는
앗아간 걸 어찌할꼬
- 처용가 -
 
처용이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물론 설화상의 얘기일 뿐이다. 실제 처용이 어떤 인물이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과 연구들이 있다.

처용의 얼굴이 부적이 되었다는 대목에서 처용이 무당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한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처용이 중동인이었을 것이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한때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간첩활동을 해 왔던 단국대 정수일 교수였다.

페르시아산 유리제품, 공예품, 장식품, 석상에 새겨진 아랍권 인물의 모습 등 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적 자료들이 신라 유물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처용의 중동인설은 점차 정설에 가까워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란은 나라 밖에서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2009년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쿠시나메는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세자 아비틴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이다. 아비틴은 신라에 들어와 공주와 결혼한 후 함께 이란으로 귀국한다. 이들 사이에 페레이둔이라는 아들이 있어 원수 자하크를 이기고 이란의 구국영웅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와 이란의 인연은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 전부터 이슬람 역사학자들은 신라에 무슬림들이 정착했다는 기록을 남겨왔다. 이슬람 지리학자였던 이븐 쿠르다드비(Ibn Khurdãdhibah)는 846년 그의 저서 ‘왕국과 도로’에서 신라와의 교역품을 소개한 뒤 신라를 일컬어 ‘무슬림들이 한 번 도착하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곳’이라 묘사했다.

10세기 무렵의 알 마수디, 이븐 루스타 등이 무슬림, 특히 페르시아인들의 신라 정착에 대해 언급한 것 외에도 무슬림 학자들에 의한 신라 언급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무슬림들의 한반도 집단거주는 적어도 조선 세종 시기까지 계속됐을 것이라는 게 다수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
회회 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 쌍화점 -

고려속요 ‘쌍화점’의 쌍화가 과연 만두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들이 있다. 하지만 ‘회회아비’가 아라비아계 몽골인일 것이라는 데는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무슬림들의 한반도 거주는 매우 흔했음을 암시해준다 할 수 있다.

고려시대 13세기 말 무렵부터는 개경 인근의 벽란도 일대에 집단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고 그 수는 최대 7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삼가(張三哥)라는 무슬림이 고려에 들어와 부지밀직(副知密直)을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 벼슬까지 하면서 고려 여인과 결혼해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뒤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세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 이슬람식 예배는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슬림들의 예배와 코란낭송, 전통복장 등에 불만이 컸던 사대부들이 1427년 세종에게 이를 금하는 상소를 올려 관철한다. 이 때부터 한반도에서 존재했던 무슬림들의 명맥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이란과 인연은 1961년 우리 측 중동친선사절단의 이란 방문과 다음해인 1962년 양국 간 수교로 다시 이어졌다. 천년 이상을 뛰어넘는 오랜 격세유전의 유전자가 남아 있었던 때문인지, 그 후 양국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볼 수 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친미국가였던 이란과 한국의 관계는 상호 우호적인 것이 당연했다. 1977년 테헤란 시장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서울에는 ‘테헤란로’가,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각각 생겨나기도 했다.

1979년의 이란혁명, 1981년 한국-이라크 간 영사급 외교관계 수립 등으로 한때 양국간 관계가 소원해진 적은 있었지만, 교역 자체는 꾸준히 유지돼 왔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는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이란에 한국산 무기를 수출했고, 각종 공사를 따내기도 했다. 친미국가와 반미국가 사이에 흔치 않은 우호관계가 잘 유지돼왔다.

몇 번의 굴곡이 없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대한 이란인들의 우호적 감정은 이란에 불어닥쳤던 한류열풍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07년에는 드라마 ‘대장금’이 95%라는 미증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2년 후에 방영된 주몽 역시 85%의 시청률을 보였다. 적대적 감정을 가진 관계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시청률이었다.

이란산 원유, 한국산 공산품과 건설기술이라는 양국 간 필요성은 잘 맞아 떨어졌고 순탄한 교역관계가 지속돼 왔다. 2010년 이란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측의 제재가 시작됐을 때에도 양국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교역을 계속했다. 당시 미국은 이란 측 석유-가스 분야에 대한 외국기업의 달러투자를 제재했다.

한국은 이란에서 석유를 수입하면서 국내 은행의 원화 결제계좌에 수입대금을 예치했다. 반대로 이란은 한국제품을 수입하면서 이 계좌에서 대금청산 방식으로 정산했다. 기가 막힌 협력관계였던 셈이다.

2012년 우리 측의 대이란 수출은 최고치인 62억5653만 달러였다. 철강, 석유화학제품, 자동차, 가전 등이 주요 수출제품이었다. 수입은 주로 원유였고 2011년 113억5838달러가 최고치였다. 2010년 미국의 제재로 수출입은 더 이상 증가하지 못하고 감소추세를 보였다.

2018년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이란 핵 합의(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다음 해인 2019년 이란 제재를 강화하면서 국내 원화 결제계좌가 막히자 양국간 교역은 사실상 중단상태에 이르렀다. 청산되지 않은 원유 수입대금은 그대로 국내 은행에 동결되면서 양국 간 관계도 불편해졌다.

2020년부터 우리나라의 이란 수출은 2억 달러를 밑돌고 있고 수입 또한 1억 달러 이하가 됐다. 한때 이란은 우리에게 20위의 수출대상국이었으나 현재는 97위로 내려앉은 상태다. 우리 경제규모에서 사실상 교역관계가 중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8월10일 이란 국영통신인 IRNA가 미국과 이란 양국 간 수감자 교환협상이 이루어지게 됐다는 보도를 냈다. 곁들여 동결돼 있던 이란 자금문제도 해결방안이 열렸음을 알렸다. 한화 약 8조원 정도의 이 금액은 8월12일 유로화로 환전을 위해 전액 스위스 은행으로 이체됐다. 현재 이란 측 은행으로의 이체 과정이 진행 중이다.

한국과 이란이 새로운 경제협력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 계기가 다시 만들어진 셈이다. 실제로 상대국가에 대한 양국 경제주체들의 기대감은 높다.

경제제재 조치 전 이란인들 사이에서 한국산 자동차와 가전에 대한 인기가 높았던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트럼프 정부의 제재 강화로 현대차와 기아차가 이란시장에서 철수하기까지 현지 판매량은 연간 4만5천여 대에 달했다. 이란의 경제여건상 부품시장과 중고차 시장은 매우 활발하다.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은 경제제재 이전 이란업체와 합작방식으로 국산 부품을 현지에서 조립 판매한 이력을 갖고 있다. 재기 가능성이 충분한 시장이랄 수 있다.

이란에서 한국산 가전제품의 인기는 단연 최고다. 한때 자국 가전산업의 보호를 위해 한국산 가전 수입금지가 언급됐을 정도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의 경제제재에 동참해 원유대금을 동결했던 것에 대한 보복적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국산 가전제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12년 우리나라의 대 이란 가전수출은 8억 달러를 넘어선 바가 있다. 14억7천만 달러 이상이었던 철강제품, 8억7천만 달러 이상이었던 석유화학제품에 이어 세 번째 주요 수출품에 해당했다. 여기에 건설, 기계, 생활용품, 화학제품, 섬유관련 등 우리로서 이란은 다양한 수출상품 시장이기도 했다.

수입 측면에서 이란산 원유는 가성비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산 콘덴세이트(초경질유)는 나프타 함량이 70% 이상으로 12%에 달하는 두바이산 중질유보다 크게 높다. 석유화학 산업이 발달해있는 국내 산업구조상 기초 원료인 나프타의 수요는 클 수밖에 없다.

초경질유로 가격도 저렴해 원유 수입금지 조치 이전 국내 정유업계의 초경질유 수입에서 이란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5.18%에 달했다. 전체 원유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6%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미국, 이라크에 이어 5번째에 해당했다.

이란에 대한 미국 측의 경제제재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핵 협상이라는 중요한 고비가 남아 있다. 제재가 풀린다 해도, 이전처럼 좋은 관계가 재개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란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제재에 동참했던 우리측에 앙금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동결됐던 원유수입 대금을 지체없이 상환에 들어간 것은 잘 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앙금이 다 풀릴 리 없다.

게다가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연초 이란을 아랍에미리트연합국(UAE)의 적이라고 규정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이란측의 반발을 산 바가 있다. 이에 대한 이란측의 불편함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장을 아끼는 마음가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는 주요 교역대상국을 너무 헤프게 흘려버리는 경향이 있어 왔다.

한미일 공조라는 이념의 틀에 얽매인 나머지 중국시장과 러시아 시장에서 우리 스스로 입지를 좁혀왔다. 한때 동남아 시장과 인도를 중심으로 적극 추진해오던 신남방 정책이 폐기된 이후 이들 지역에 대한 별다른 가시적 시장개척 노력은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저기 시장을 놓아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인구 9천만 명의 이란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중동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두 번째 경제대국이다. 원유 매장량은 세계 4위이다. 수출시장으로서의 가능성도 무한하지만, 원유 수입대상국으로서도 수출시장 못지 않게 중요한 나라다.

미국의 제재가 완전히 풀리기 전에 선제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다 풀리고 나면 그때는 이미 늦다. 이해시킬 것은 이해시키고, 풀어줄 앙금같은 것이 남아있다면 풀어주는 사전적 정지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은 외교의 몫이다.

이미 1200여 년 전부터 활발한 무역을 했던 이란과는 올해 수교 61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오랜 인연과 무한한 가능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란시장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광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