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기술이 좋은 기업이라고 반드시 세계 시장을 제패하는 건 아니다.

CATL을 비롯한 중국 배터리 기업들처럼 고객들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의 기능을 싼값으로 제공해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데스크리포트 9월] '좋은 것보단 싼 것', K배터리의 새로운 생존 조건

▲ CATL을 비롯한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저렴한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이를 클레이튼 크리스턴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저서 '혁신 기업의 딜레마'에서 '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파괴적 혁신이란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들이 고객의 필요를 앞서는 혁신을 해나갈 때 이 틈을 파고들어 저렴한 제품으로 밑바닥을 공략해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것을 말한다. 

파괴적 혁신을 이룬 기업들은 생존의 발판을 확보한 뒤 기술을 점차 높여가 결국 기존 시장 전체를 장악하기도 한다. 

중국 배터리 기업들은 폐쇄적이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자국 전기차 시장을 바탕으로 저렴한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앞세워 사업 규모를 키운 뒤 세계 시장을 잠식해 가고 있다.

K배터리의 맏형 LG에너지솔루션은 2020년까지만 해도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점유율에서 선두를 놓고 중국 CATL과 20%대 초반 수준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CATL은 그 뒤 LG에너지솔루션과 격차를 해마다 벌려 나갔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CATL의 올해 상반기 기준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점유율은 36.8%까지 치솟았다. LG에너지솔루션과는 20%포인트 이상 차이가 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중국 배터리 업계 2인자 BYD에도 밀려 세계 3위로 내려앉았다. 

물론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선 아직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주도권을 앞세워 선두를 지키고 있지만 CATL이 어느새 턱밑까지 따라왔다. 현재로선 LG에너지솔루션이 역전을 허용하는 일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중국이 앞세우는 LFP 배터리는 K배터리 업체들의 삼원계 배터리와 달리 비싼 코발트와 니켈을 쓰지 않아 생산비용이 30%가량 덜 든다. 대신 주행거리가 삼원계 배터리와 비교해 짧고 특히 겨울에는 효율이 급격히 떨어진다. 

하지만 가격이 싸고 화재 위험도 낮다 보니 주요 자동차 업체들이 점차 LFP 배터리 채택을 늘려가고 있다. 세계 전기차 1위 테슬라뿐 아니라 벤츠, 폭스바겐, 포드 등이 이런 추세에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기업 현대자동차그룹까지도 싼 차에는 LFP 배터리를 쓴다.

전기차 시장 초기에는 비싸더라도 품질이 좋은 K배터리가 글로벌 시장에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얼리어답터들이 거의 구매를 마치면서 올해 들어 전기차 판매 성장률이 점차 둔화하자 자동차업체들이 전기차 가격에 더욱 신경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모든 시장이 그렇듯 전기차가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저렴한 배터리가 늘어나야 한다. LFP 배터리는 여기에 딱 맞는 제품이다. 
 
[데스크리포트 9월] '좋은 것보단 싼 것', K배터리의 새로운 생존 조건

▲  중국 배터리 기업인 CATL이 8월16일 새 배터리 제품인 셴싱(Shenxing)을 공개하는 모습. <연합뉴스>


더구나 CATL 등 중국업체들은 LFP 배터리의 고질적 문제인 주행거리와 충전 속도를 삼원계 배터리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개선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물론 이를 놓고 품질에 콤플렉스가 있는 중국 업체들의 과장이 섞여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또 고가의 삼원계 배터리와 저가의 LFP 배터리는 시장 자체가 다를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크리스턴슨 교수가 말한 파괴적 혁신의 수순을 착실히 밟아가는 건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중국 내수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중소 배터리 업체들이 이탈하면서 CATL이나 BYD 같은 중국 상위권 업체들의 생산 능력과 가격 경쟁력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K배터리 업체들로서는 본격적인 세계 배터리 패권 경쟁을 앞두고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이에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고급 제품 비중이 높았던 삼성SDI까지도 LFP 배터리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만 K배터리 업체들의 전기차용 LFP 배터리 양산에는 2, 3년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K배터리 업체들은 중국이 진출하지 못하는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앞선 브랜드 가치와 기술력을 앞세워 초기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 하락을 최대한 방어하면서 대중적 제품을 내놓는 일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이 크다.

K배터리 업체들로서는 글로벌 배터리 시장의 패권을 위해 차세대 전고체 배터리 같은 차세대 제품 기술 개발뿐 아니라 저렴하고 대중적 제품을 통한 파괴적 혁신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국내 증시에서는 배터리 관련 산업에 대해 기대감으로 번진 투자 열기가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 상황이다. K배터리 업체들이 보급형 제품에서 성과를 내느냐 여부는 앞으로 배터리 관련 기업에 투자 판단을 내리는데 중요한 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창욱 산업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