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문화프리즘] 공자 후손 한국인, 한비자 후손 중국인

▲ 중국에서 가장 영향령 있는 사상가는 한비자다. 중국 공산당이나 기업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그렇다. 사람을 늘 의심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은 한비자를 읽는다. 사진은 공자(왼쪽)과 한비자(오른쪽).

[비즈니스포스트] 친한 사람이 사기를 당했다. 그러면 누구를 탓하고 나무라야 할까?

당연히 사기를 친 그 인간이 나쁘다. 그래서 그 나쁜 인간을 탓하고 욕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사기당해서 분하고 억울해 죽겠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사기당한 네가 잘못이야. 집 밖에만 나가면 어차피 다 사기꾼들이야. 그걸 모른 네가 바보지. 남 탓할 것 없어!” 

말이 참 야박하다. 다른 사람 아픔에 공감이 부족한 몰인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기를 당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원래 세상 사람들은 다 믿을 수 없고 틈만 나면 속이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 말고, 늘 의심하고, 마음을 쉽게 열어주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원래 남을 속이고 이용하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간관계를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고 혹시라도 만나는 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을지 늘 경계하고 조심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대개 이렇다.

중국 작가 루쉰은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중국인이 지닌 나쁜 속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런 루쉰이 중국인의 나쁜 특징의 하나로 꼽은 것이 의심이 많다는 점이다.

중국인이 의심이 많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오랜 중국의 역사 경험에서 오는 것으로 정치나 지도자에 대한 불신이 그 배경일 수 있다. 그래서 황제나 나라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하면서 나름의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는 중국 속담도 그런 경험에서 나온 지혜다.

다른 이유도 있다. 많은 중국인이 사람의 본성은 원래 착하지 않다고 보는 일종의 성악설을 신뢰하는 데도 원인이 있다. 집 밖을 나가면 늘 사람을 경계하고 낯선 사람을 보면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은 중국인이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밥 한 끼 같이 먹고 술자리 한 번 같이 했다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사람 사귀는데도 신중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러 번 만나면서 시간을 두고서 그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살핀다. 

그래서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말은 멀리 길을 가봐야 그 힘을 알 수 있고, 사람은 오래 사귀어야 그 속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이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이유도 낯선 사람은 믿을 수 없어도 친구는 믿을 수가 있어서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나 맹자는 사람은 선한 본성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자 후손인 중국인은 왜 사람이 악한 본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중국인이 공자 후손인 것은 맞다. 그런데 중국인의 일상을 지배하고 중국 정치와 국가 운영을 지배하는 원리는 공자나 맹자가 아니다. 

중국 제왕과 선비들은 논어와 맹자를 과거 시험을 위해서 그리고 도덕적인 당위 차원에서 읽었다. 하지만 현실 통치를 위해서는 악한 속성을 지닌 인간을 어떻게 통치할지를 다룬 한비자를 읽었다. 
 
[한중 문화프리즘] 공자 후손 한국인, 한비자 후손 중국인

▲ 중국 작가 루쉰은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중국인이 지닌 나쁜 속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런 루쉰이 중국인의 그런 특징의 하나로 꼽은 것이 의심이 많다는 점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금도 그렇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에서도 기업에서도 중국인의 일상생활에서도 공자가 아니라 한비자가 더 영향력이 세다. 악한 속성을 지닌 사람을 늘 의심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을 조직 안으로, 나라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들은 한비자를 읽는다. 

유교는 중국인의 도덕적 가르침으로 작용할 뿐 중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상은 법가다. 법가는 상과 벌을 엄정하게 적용해야 질서가 서고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기본이다.

그런데 왜 상과 벌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게 중요한가? 사람은 선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우선하여 챙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상을 주고 때로는 벌을 주면서 신하와 백성을 단속해야 한다는 게 한비자의 기본 생각이다.

한비자가 보기에 인간이란 원래 대의명분이나 도덕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다. 한비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중국 위나라에서 어느 부부가 소원을 빌었다. 아내가 소원을 말했다. 

“우리 부부를 평안하게 해주시고, 삼베 백 필이 생기게 해주십시오.” 

자고로 재물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어서 부인의 말을 들은 남편은 기분이 상했다. 겨우 삼베 백 필을 바라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왜 그리 바라는 게 적은 거요?” 

아내가 대답했다. 

“그보다 많아서 부자가 되면 당신이 첩을 들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비자가 말하려는 것은 부부 사이에도 서로의 이익이 다르다는 거다. 남편의 이익과 아내의 이익이 다른 것이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말은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 같은 도덕적 차원에서나 그럴까, 현실에서 부부는 서로 자기 이익을 생각한다는 게 한비자 생각이다.

어디 부부 사이에만 그럴까? 한비자가 보기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도 서로 생각하는 이익이 다르다. 군주는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여 이익을 챙기려 하지만, 신하는 무능하면서도 일을 맡으려고 하고 더구나 많은 녹봉을 받아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관을 짜서 파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요절하기를 바라고, 의사가 고름 짜는 걸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가 착하거나 사명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모두 한비자에 들어 있는 사례다. 인간이란 대의명분이 아니라 이익 추구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 사람의 행동과 사람 사이 관계는 이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이익을 위해서 서로를 이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비자는 성악설 시각에서 인간의 속성을 보았다. 그는 성악설을 바탕으로 황제가 어떻게 신하와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진시황에게 조언했다. 진시황은 유교가 아니라 한비자 말에 따라 천하를 통일했다. 

어디 진시황만 그런가? 중국 역대 제왕과 리더들이 통치에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은 논어나 맹자가 아니라 한비자다. 공자 말에 따라 치세에 성공한 통치자가 많은지 아니면 한비자에 따라 치세에 성공한 통치자가 더 많은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중국 대표 기업 화웨이에는 국가로 치면 헌법에 해당하는 화웨이 기본법이라는 게 있다. 이 기본법에서 앞에 나오는 중요 조항 중 하나에 화웨이는 ‘이익을 공유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가족 개념으로 회사와 종업원이 만나는 게 아니라 서로 이익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맺는 관계라는 것을 쿨하게 규정하고 있다. 회사는 직원에게 이익을 줘야 하고 직원은 이익을 위해 회사에 헌신한다는 것을 회사의 기본 방침으로 정해놓은 거다. 

화웨이가 주식회사가 아니라 유한회사를 고집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내 조직원끼리 주식을 공유하면서 조직 내 상호 이익 관계를 보전하려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다. 화웨이의 이런 쿨한 경영 이념, 사람은 이익 때문에 움직인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조직 속 인간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한비자의 생각이 그 뿌리다.

한국인은 중국인보다도 더한 공자와 맹자의 ‘찐’ 후손이다. 특히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주자의 진정한 후손이다. 이런 유전자를 지닌 한국인으로서는 한비자 같은 인간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조선 시대 주자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이 한비자를 중시하지 않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 유교 선비들은 군신유의, 즉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의로움으로 맺어져야 한다는 도덕적 신념을 지녔고 무릇 사람이란 누구나 하늘을 닮은 천성, 즉 선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임금과 신하 사이도 이익으로 맺어진다는 한비자 주장과 같은 인간관과 통치술이 귀에 들어올 이유도 없었고 그의 책을 중요하게 읽을 까닭도 없었다. 한국인은 자고로 성선설의 신봉자들이다.

한국인이 대의명분과 의리를 중시하고 중국인이 일상의 안일과 이익을 중시하는 게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니다. 오랜 역사 동안 사람을 보는 눈이 그만큼 달랐다. 

한국과 중국이 같은 유교 국가라고 착각하면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을 절대로 깊이 읽지 못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대중국 비즈니스에서도 외교에서도 명분과 자존심은 챙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리는 잃을 것이고 결국 중국에 늘 잃고 지기만 할 것이다. 

한비자만 쫓자는 게 아니라 한국과 한국인이 공자와 한비자 사이에서 균형을 찾자는 제안이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
 
현재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사범대학교 대학원 고급 진수과정을 수료했고 하버드대학교 페어뱅크 중국연구소 방문교수를 지냈다. 중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며 여러 권의 책을 냈고 jtbc '차이나는 클래스', EBS '내일을 여는 인문학'에 출연하는 등 대중과 소통에도 활발하게 나서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욱연의 중국 수업',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이만큼 가까운 중국',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 지성'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 '들풀', '광인일기',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아큐정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