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체력 effect] 여성은 무섭다, 더 강력한 제도로 남성 범죄 막아달라

▲ 수사물의 명품 ‘시그널’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 김혜수의 역할은 인상적이었다. 여성 형사든 ‘길복순’ 같은 킬러든 두려움 없이 남성 범인과 맞서 제대로 두들겨 패는 장면을 자주 보고 싶다. 아니, 당연히 두렵겠지만 매일 반복하는 육체 단련과 연습을 통해 점점 단단해지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면 좋겠다.

[비즈니스포스트] 철없던 어린 시절, 내가 꿈꾼 미래의 직업은 ‘탐정’이었다. 코난 도일이 쓴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나. 명탐정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셜록 홈즈처럼 냉철한 추리를 통해 어려운 살인 사건들을 척척 해결하고 싶었다. 

오래지 않아 탐정이란 일은 그저 영국의 소설 속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내 관심사는 ‘형사’ 쪽으로 움직였다. 당시 혹시라도 놓칠세라 눈에 불을 켜고 보던 최애 드라마가 ‘수사반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추레한 아저씨들로만 이루어진 형사기동대였는데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어린 내 눈에 죄를 저지른 범인을 합법적으로 잡아들이는 행위가 정의롭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에게 형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매우 막연하기 그지없었다. 실제로 탐정만큼이나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허구로 만들어진 드라마에서조차 여성 형사라는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나온 책 ‘형사 박미옥’을 보니 1991년에야 처음으로 서울지방경찰청에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되었다고 한다. 박미옥은 23세에 선발돼 한국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성 형사가 된 셈이다.

그냥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순경이 된 그는 민원실에서 평범하게 근무하고 있었다. 모집을 주관하던 상사가 “어디 한번 지원해 보라”는 권유에 “느닷없이 계획 없이 그야말로 ‘교통사고’처럼 형사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즉, 이미 순경이었던 여성에게조차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그는 본인이 세운 ‘최초’의 기록들을 스스로 갈아치우면서 여성 형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그러한 성장과 분투가 있었던 덕분일까. 최근 드라마에선 흔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여성 형사들을 볼 수 있다. 더 이상 들러리가 아니요, 남성들 틈에 낀 약한 동료도 아니다.

수사물의 명품 ‘시그널’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 김혜수의 역할은 인상적이었다. 마침 최근에 본 ‘낮과 밤’이나 ‘악마 판사’에 등장한 여성 형사의 존재도 꽤 두드러졌다. 무기를 소지한 범인들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해서 아슬아슬하면서도 대리만족하는 기분조차 들었다.

과연 여성으로서 형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들은 범인이 무섭지 않을까. 그들을 검거할 때 수반되는 폭력과 격투가 두렵지 않을까.

박미옥 형사는 두 가지 족쇄와 싸워야 했다고 고백한다.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세상에 광범위하게 깔린 편견. 그보다 더 만만치 않았던 족쇄는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범죄자와 맞닥뜨린 후부터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두려움이었다.

‘합법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직업으로 삼은 여성 형사마저도 모든 현장이 무서웠단다. 하물며 우리처럼 힘없고 가녀린 보통 여성들이 “묻지 마 강간 살인”의 피해자가 될 때마다 그 사건을 뉴스에서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의 크기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형사의 두려움은 예견되어 있고, 범인의 두려움은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두려움은 난데없다. 왜 겪어야 하는지 모를 세상 억울한 두려움이 될 수 있다.”

지난 달 신림동에서 또 한 여성이 강간 살해범의 피해자가 되었다. 물리적, 성적으로 약한 여성이 얼마나 더 남성의 폭력에 희생양이 되어야 하나. 정말이지 무섭다. 더 강력한 여성 편향 법과 제도로 남성 폭력을 막아 달라고 호소하면 불평등한 발언인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한 대학 캠퍼스 내에서 여성 학생을 강간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 당국에서는 여성들에게 함부로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그 방법은 틀렸다. 오히려 남성들을 밤에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정답이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쪽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법이나 처벌은 관계자에게 맡기고 여성 작가인 나는 단순히 정서면으로 접근해 보고 싶기도 하다. 현실 세계에선 드물겠지만 소설이나 드라마 또는 영화에서라도 보다 많은 여성들이 등장해 육체의 강인함을 선보이면 좋겠다. 

여성 형사든 ‘길복순’ 같은 킬러든 두려움 없이 남성 범인과 맞서 제대로 두들겨 패는 장면을 자주 보고 싶다. 아니, 당연히 두렵겠지만 매일 반복하는 육체 단련과 연습을 통해 점점 단단해지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면 좋겠다. 

좀 더 실용적인 방안은 없을까. 여성이라면 누구나 태권도 또는 합기도 의무교육을 받으면 어떨까. 20세가 되는 남성들이 군대에 가는 것처럼 여성들도 1년 정도 단체로 모여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때마다 주는 밥을 먹으면서 건강하게 육체를 단련할 의무가 주어진다면? 말도 안 되는 발상일까? 정작 젊은 여성들은 싫어하려나? 오죽 두렵고 답답하면 이러겠는가.

‘신림동 강간 살인’ 같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혼자서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그럼에도 호신술을 가르치는 한 여성 전문가는 말했다. 폭력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우선 그 자리를 모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에이, 앉아서 무서워하는 대신 나가서 달리기 연습이나 해야겠다. 5킬로미터든 10킬로미터든 따라오지 못할 만큼 뛸 수 있게 말이다. 마녀체력
 
작가 이영미는 이제 ‘마녀체력’이란 필명으로 더 유명하다. 27년간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살았다. 한국 출판계에서 처음으로 대편집자란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지만, 갈수록 몸은 저질체력이 되어 갔다.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15년간 트라이애슬론으로 꾸준히 체력을 키워 나갔다. 그 경험담을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주제로 묶어 내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출판 에디터에서 작가로 변신했으며 <마녀체력> <마녀엄마> <걷기의 말들>을 썼다. 유튜브 지식강연 '세바시'를 비롯해 온오프라인에서 대중 강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