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 하면 보통 지휘자를 지칭한다. 그럼 지휘자 하면 누구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21세기 대한민국, 특히 수많은 영상음원 매체들의 혜택을 받고 있는 젊은 층에서는 다른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욱 많은 사람들, 심지어 클래식 음악의 문외한들까지도 지휘자 하면 눈을 감고 지휘봉을 잡고 있는 그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헤름헤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 150년을 사이에 두고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와 같은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세기의 거장은 그의 사망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가 남긴 수많은 유산들을 통하여 인류에 회자되고 있다. 카라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피아노의 신동으로 불린 그는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지휘자로 데뷔한 지 5년 만에 독일 아헨 시립 오페라 극장의 최연소 음악감독의 지위에 올랐고, 나치에 입당하여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의 총감독 자리에 올라 제3 제국의 지휘자로 추앙받았으며, 종전 이후 나치와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잠시 휴식기를 가졌지만 곧 음반 녹음을 통하여 활동을 재개하였고, EMI의 매니저 겸 프로듀서인 월터 레그를 만나 재기에 성공한 이후 서거 직전까지 베를린 필의 종신 음악감독, 빈 악우협회 종신 지휘자로 재직하였고,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런던 필, 루체른 페스티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베를린 필, 빈 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수많은 영상물과 음반들을 제작하였으며,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와 카라얀 지휘 콩쿠르 등을 창설하는 등 마에스트로라는 칭호에 걸맞은 세계 최고의 음악가로서 활동했다. 카라얀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가 있다. 화려한 노란 딱지의 음반과, 눈을 감고 지휘하는 그의 특유의 포즈가 바로 그것인데, 화려한 노란 딱지는 바로 그와 계약돼 있던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 이하 DG)’음반사의 로고이고, 눈을 감고 지휘하는 것은 그의 음악적인 신념과 예술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먼저 그의 음반이다. 그는 생전 500여 종의 음반과 80여 종의 영상물을 남겼는데, 사후 현재까지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 미발표 음반과 영상물, 리마스터링 음반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음반과 영상물을 수도 없이 제작한 이유는, 물론 음반 녹음이 2차대전 이후 그를 포디엄에 다시 세워주었고, 자신이 기계와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지만(자동차, 요트, 스키, 심지어 비행기 운전도 그의 취미였다), 그가 생전에 오페라 연출, 음악 영화 연출, 매니지먼트 사업, 음악 교육, 음악 치료 등의 영역까지도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을 생각해볼 때, 기본적으로 자신의 음악적 성과를 기계적인 음향과 영상장치로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기 쉽도록 보존하여 그러한 클래식 음악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고 교육하며 이해시키는 것이 첫 번째이고(물론 이는 자신의 명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지만), 철저하고 치열한 녹음작업을 통한 오케스트라의 기량 향상 혹은 유지가 두 번째였을 것이다. 특히 그는 지금은 사라진 콤팩트 카세트와 콤팩트 디스크(CD)의 대중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영상물을 촬영할 때면 연주자들의 의자 각도와 연주 동작, 그리고 지휘자 위주의 카메라 워크도 철저하게 계산해서 넣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는 그가 지휘한 브람스 독일 레퀴엠 영상물의 합창단 배치만 봐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은 그의 음악을 실연으로 접할 수 없으니 그의 음반들을 놓고 그의 음악을 평가할 수밖에는 없는데, 사실 여기에 필자를 비롯한 음악가, 그리고 음악 애호가들과 평론가들의 굉장한 호불호가 갈린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원전악기와 새로운 오리지널 판본 등을 통한 원전연주 열풍이 불면서 그의 음악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데, 그가 EMI와 DG에서 50, 60, 70, 80년대에 각 한 번씩 총 4번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음반이 그 논란의 핵심에 있다. 카라얀과 다른 지휘자들의 차이를 누구나 가장 쉽고 빠르게 비교해볼 수 있는 곡이 바로 베토벤 교향곡이니까. 지휘자에게 베토벤 교향곡은 마치 지휘봉과도 같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피아노로 치면 아마추어건 전공자건 누구나 거쳐 가야 하는 체르니나 하농과도 같다고 할까. 카라얀이 소니의 아키오 모리타 사장과 필립스의 수뇌부들과 손잡고 CD를 처음 만들 당시 그 규격을 정할 때, “적어도 베토벤 9번 교향곡은 한 CD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카라얀의 말에 최종 규격을 74분으로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특히 카라얀의 베토벤은, 10년마다 조금씩 달라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카라얀의 장기인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중후한 사운드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여기서 논쟁이 시작되는데,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경계선상에 있었던(심지어 후기로 가면 현대음악적인 면도 보이는) 베토벤의 음악에 비하면 너무나 과도한 오케스트라 편성과 유럽 오케스트라 특유의 화려한 음색을 위한 전체적으로 약간 높은 음정, 카라얀 특유의 현악기 비브라토로 인하여 전체적인 음악이 너무나도 묵직하고 무거우며, 매우 빠르지만 그것이 절대로 날렵하지 않게 들린다는 것이 카라얀의 음악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야기이다. 즉 카라얀의 모든 음악에서는 오직 독재자 카라얀만이 보일 뿐 베토벤을 비롯한 작곡가들이 요구한 음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음반(특히 60년대 아니면 70년대 녹음한 음반)을 모든 베토벤 초심자들에게 추천하고 있다. 물론 아바도나 데이비드 진먼의 새 판본에 의한 음반과 존 엘리엇 가디너 경의 원전악기 음반과도 함께. 그 당시 정말 그렇게 연주되었을 것만 같은 가볍고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베토벤 전집과, 음악적인 완벽을 추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찾아온 장애 때문인지 매우 괴팍한 성격이지만 평생 그가 그토록 찾고 갈망하던 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투쟁했던 베토벤의 굳어진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은 카라얀의 베토벤 전집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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