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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래틀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가장 많이 주목받은 지휘자 중 한 명으로 2018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다. |
마치 프로포즈할 상대를 눈앞에 두고 하루 종일 숨겨놓았던 반지를 꺼내드는 기분이랄까. 드디어 이 사람에 대해 소개할 때가 온 듯하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주목받았던 지휘자. 영국의 버밍엄 심포니를 일약 세계 정상급의 오케스트라로 끌어올린 지휘자. 그리고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끄는 수장. 바로 사이먼 래틀이다.
래틀은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가 집안 출신의 음악 선생으로 집에서 재즈를 즐겨 연주했다. 그의 집안은 매우 음악적 분위기였다. 매주 일요일이면 가족들이 음반을 틀어 놓고 악보를 보며 적절하게 리듬을 연주하는, 조금 이상한 ‘가족 음악회’를 열었다.
그의 재능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다. 15세에 리버풀 신포니에타를 조직하여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았으며 16세에 왕립 음악원에 들어가서 지휘와 오페라를 공부했다.
특히 1973년 뉴 런던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왕립 음악원에서 말러의 2번 교향곡을 지휘했다. 말러는 그때부터 그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곡가가 되었다.
래틀은 3년만에 왕립 음악원을 졸업하고 존 플레이어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그는 본머스 심포니와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일했다. 드디어 25세의 나이로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수석 지휘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버밍엄 심포니의 음악 감독 자리에 오르자마자 "나에게 베토벤의 음악을 기대하지는 마라. 나는 앞으로 모험심을 가지고 음악의 세계를 탐험할 것"이라는 발언으로 고전주의 음악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있던 청중들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래틀은 전통적 음악과 현대적 음악을 함께 배치시킨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렸으며, 이는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에게 있어 음악회는 청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아닌, 무언가를 배웠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일종의 교육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이먼 래틀은 이 작업을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 취임해서도 계속 해나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필자가 베를린에 체류하던 시절 래틀의 베를린 필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그 시즌에 걸쳐서 올렸었는데. 꼭 전반부에 베베른의 현대음악이 연주됐다.
즉 1부 첫 곡이 베토벤 1번 교향곡이라면 그 다음 베베른의 파사칼리아가 연주되고, 2부에 베토벤의 3번 영웅 교향곡이 연주되는 식이었다. 필자는 특히 사이먼 래틀의 현대음악 해석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당시 베베른 파사칼리아 연주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사이먼 래틀과 버밍엄 심포니의 대표적 음반이 하나 있다. 바로 앞서 언급했던 말러 교향곡 2번 음반이다. 이 음반 하나로 래틀의 이름이 전 세계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알려졌다. 그가 바렌보임과 경쟁 끝에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 자리에 올랐을 때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계기가 되었다. 필자도 이 음반을 통하여 사이먼 래틀이라는 지휘자를 알게 됐다.
래틀은 골드슈미트, 토마스 아데 등의 현대음악을 많이 연주하고 있다.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하이든의 교향곡을 음악회장으로 끌어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와 베를린 필의 첫 내한공연 당시에도 하이든의 교향곡 86번을 연주했다. 마치 원전연주에 가까운 음향과 빈틈없는 리듬과 앙상블, 그리고 하이든이 숨겨 놓은 유머러스함을 그대로 찾아내어 더욱 반짝반짝하게 다듬어낸 래틀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전주의 음악에 대한 그의 천재성은 필자가 독일에서 관람했던 베를린 필과 베토벤 전곡연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의 베토벤 교향곡 1번과 2번 연주는 정말 누구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카라얀의 전통적 사운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가 베를린 필과 베토벤의 후기 교향곡이나 브람스 등을 연주할 때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경우가 꽤 있다.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마치 작곡가가 악보 뒤에 숨겨 놓은 보물을 오늘 중으로 무조건 찾아내야만 한다는 듯 때로는 조금 과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호불호의 문제일 뿐이다. 곡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보여주다가 때로는 순간의 재치있는 음악적 표현과 효과로 청중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의 뛰어난 음악성은 왜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또한 현대 음악을 비롯한 기존에 잘 연주되지 않던 새로운 레퍼토리의 개발은, 21세기 클래식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데릭 쿡 버전의 생소한 말러 10번 교향곡이 메인 프로그램에 등장하다니. 베를린 필의 전통적인 송년음악회에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가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연주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음악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래틀의 베를린 필 취임기념 말러 5번 교향곡 연주를 꼭 권하고 싶다. 음반도 괜찮지만 이왕이면 영상물이 좋다. 아까 말했듯이 래틀의 하이든 교향곡 음반도 정말이지 훌륭하다. 또한 그의 베를린 필 취임 이후 EMI에서 그와 베를린 필의 연주 실황음반을 꾸준히 발매하고 있기 때문에 래틀의 팬이라면 아마 매우 반가워할 것이다.
2018년 여름 이후 래틀은 베를린 필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그의 다음 행보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지휘자 김광현은 예원학교 피아노과와 서울예고 작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하였다. 대학재학 중 세계적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에게 한국대표 지휘자로 발탁되어 제9회 미야자키 페스티벌에서 규슈 심포니를 지휘하였고, 서울대60주년 기념 정기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재학생 최초로 지휘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 지휘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니, 로이틀링겐 필하모니, 남서독일 콘스탄츠 관현악단,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심포니, 경기필, 부천시향, 원주시향, 과천시향, 프라임필 등을 지휘하였다. 현재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재직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