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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수치에 밝고 꼼꼼한 2세경영자 [2016년]
김디모데 장윤경 기자 Timothy@businesspost.co.kr | 입력 : 2016-02-22 10:26:16

   
▲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 생애

박찬구는 1948년 8월13일 광주광역시에서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회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제일고등학교와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했다.

금호실업 이사로 기업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 부회장을 역임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화학부문 회장에 올랐으나 형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면서 이사회에서 해임됐다.

박찬구는 금호석유화학을 중심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부터 독립해 현재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 가족관계

박찬구는 아버지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주와 어머니 이순정씨 사이에서 4남 3녀 가운데 4남으로 태어났다.

첫째형인 박성용씨는 예일대 경제학 박사과정 졸업 뒤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 경제담당 보좌관을 지냈다. 이후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다 제2대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예술의전당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5년 사망했다.

둘째형인 박정구씨는 제3대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으며 2002년 사망했다.

셋째형인 박삼구씨는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며 전국경제인연합 부회장과 한국프로골프협회장 등을 지냈다.

남동생 박종구씨는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을 거쳐 아주대 교육대학원 교수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을 맡고 있다.

첫째 누나 박경애씨는 배영환 삼화고속 회장의 부인이며 둘째 누나 박강자씨는 금호미술관 관장과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여동생 박현주씨는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과 결혼했다. 박현주씨는 상암커뮤니케이션즈 부회장과 대상홀딩스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박찬구는 부인 위진영씨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부인 위씨는 위창남 전 경남투자금융 사장의 딸이다.

장남 박준경씨는 고려대학교에서 환경생태공학을 전공하고 금호석유화학에 입사해 상무로 근무하고 있다.

장녀 박주형씨는 1980년생으로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특수교육학과를 나와 금호석유화학 상무로 근무하고 있다. 2016년 1월 11일 21일, 22일 금호석유화학 주식 3천 주 가량을 매입했다. 이때까지 박주형씨의 보유 지분율은 0.68%였다.

◆ 학력

1967년 2월 광주 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교 통계학과에 입학해 1972년 2월 졸업했다.

2009년 5월 아이오와주립대학교 명예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경력

박찬구는 1976년 한국합성고무에 입사했다. 1978년 1월부터 1982년 4월까지 금호실업 이사로 근무했다. 같은 해 5월 금호건설 상무로 자리를 옮겨 1983년 12월까지 일했다.

1984년 1월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 부사장에 올랐으며 1988년 2월까지 재직했다. 1989년 3월 금호몬산토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금호그룹 회장부속실 사장, 금호타이어 금호그룹 비전경영실 사장을 맡았다.

1996년에서 2003년까지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했다.

2000년 3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금호미쓰이화학 대표이사 사장, 2000년 9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금호케미칼 대표이사 사장을 같이 맡았다.

2004년 1월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으며 2006년 11월 금호아시아나그룹 화학부문 회장에 올랐다. 2009년 7월 그룹 경영문제로 박삼구 회장과 갈등을 빚고 회장에서 물러났다.

그러다 2010년 3월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해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선을 그으며 독자적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0년 6월 채권단과 경영정상화를 위한 자율협약을 맺었다.

2010년 5월에서 2011년 4월까지 세계합성고무생산자협회(IISRP) 회장을 맡았다.

◆ 사건/사고

박찬구는 셋째 형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그룹 회장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형제의 전쟁’을 시작했다.

박찬구와 박삼구 회장은 2006년 대우건설 인수 과정과 2008년 대한통운 인수 과정에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두 회사 인수에 대한 견해차이로 형제간의 관계가 나빠진 것이다. 당시 박찬구는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를 반대했지만 박삼구 회장은 이를 추진했다.

박찬구는 형제경영의 원칙이 훼손됐다고 판단해 분리경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금호산업 지분을 매각하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나빠져 결국 2009년 7월 박삼구 회장은 박찬구를 금호석화 대표이사에서 해임시키고 자신도 물러났다.

박찬구는 2010년 2월 채권단이 금호석유화학의 분리경영을 결정해 2010년 3월부터 금호석유화학 회장으로 복귀했다.

두 사람은 ‘형제 갈등’으로 여러 건의 송사를 진행하고 있다. 크고 작은 건수만 10건에 이른다.

박찬구는 소송과정에서 2014년 2월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와 횡령, 배임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배임 관련 일부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박찬구는 검찰수사의 배후로 박삼구를 지목했다.

박찬구는 2009년 6월 미공개 내부정보를 통해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매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자신이 보유한 금호산업 주식 262만주(보유 주식 중 88%)를 집중 매도해 102억원의 손실을 회피한 혐의로 기소됐다.

또 2008년 11월부터 2011년 1월까지 금오피앤비화학과 공모해 총 23회에 걸쳐 자신의 아들에게 모두 107억5천만 원을 대여하도록 한 혐의(배임), 제품 납품대금 명목으로 31억9880만원 상당의 금호석유화학 명의 전자어음을 발행하고 지급한 혐의(횡령) 등이 추가됐다.

2014년 2월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박찬구의 운전기사를 고소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박찬구의 운전기사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보안용역직원을 사주해 비서실에서 문건을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운전기사가 보안용역직원에 86만 원 상당의 식사 등을 제공했으나 이 부분에 대한 대가성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상표권 분쟁도 벌이고 있다. 금호산업은 금호석유화학을 상대로 낸 상표권 이전 등록 등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패소했다.

금호산업은 “금호 상표는 1972년 설립된 지주회사 금호실업이 최초로 사용한 뒤 현재의 금호산업에 이르기까지 30년이 넘도록 계속해 출원, 등록, 관리해 오면서 법적 정통성을 승계해 왔다”며 “금호석유화학이 이 상표 지분을 이전해야 한다”고 소송을 냈다.

2015년 8월 1심 재판부는 “양측의 상표사용 계약은 금호석유화학이 이 상표 지분의 상당 부분을 이전받은 이후에 체결됐고 금호석유화학에 상표지분이 이전되기 전 금호산업이 해당 상표의 권리자임을 인정할 아무런 문서도 작성된 게 없다”고 원고패소 판결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바로 항소장을 접수했다.

2014년 3월 27일 열린 아시아나항공 주주총회를 앞두고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박삼구 회장의 이사 선임안과 금호산업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금호석유화학은 반발했다. 박찬구는 박삼구 회장이 아시아나항공의 사내이사로 선임되면 기업가치가 계속 훼손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찬구는 변호사 3명을 주주총회 현장에 보냈다. 이들은 박삼구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또 아시아나항공이 상호출자제한 해소를 위해 실시한 총수익맞교환(TRS)방식의 금호산업 주식 매각은 아시아나항공에 손실을 끼치는 배임행위라고 주장했다. 박삼구 회장은 박찬구의 반대에도 아시아나항공의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금호석유화학은 같은 해 4월 "주총 당시 출석한 주주와 주식수를 확인하지 않았고, 이사선임 안건에 대해 우리를 비롯한 일부 주주가 반대의사를 표시했음에도 표결에 부치지 않는 등 각종 절차적 하자로 이 결의는 부존재 사유가 있다"며 주주총회 결의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 6월 재판부는 금호석유화학이 아시아나항공을 상대로 낸 주주총회 결의 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박찬구는 또 박삼구 회장, 아시아나항공 전현직 이사 9명과 함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휘말렸다.

경제개혁연대 등 아시아나항공 소액주주들은 2014년 모두 247억6천만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들은 2009년 12월 금호산업이 워크아웃 신청한 뒤 발행한 기업어음을 투자가치가 없는데도 아시아나항공이 이를 사들여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또 2006년 회사가 유류할증료 담합조사를 받을 때 감독업무를 소홀히 해 207억 원의 과징금을 경감받지 못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2016년 2월 선고공판에서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2015년 11월 금호석유화학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계열분리를 통해 갈라섰다. 금호아시나그룹에서 금호석유화학 계열사들이 완전히 제외되면서 계열분리가 완료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5년 10월 대기업집단 소속회사 변동 현황’에 따르면 금호석유화학, 금호피앤피화학, 금호미쓰이화학 등 금호석유화학그룹 8개 계열사가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제외됐다.

형제간 벌인 여러 소송 건 가운데 1건의 소송은 2015년 10월 해결됐다.

금호그룹은 계열 분리되기 이전인 2009년 말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계열사인 금호피앤비화학을 대상으로 90억 원, 30억 원 규모의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 기업어음을 매입하도록 했다. 그러나 2010년 초 금호산업 워크아웃으로 CP대급을 지급받지 못하자 금호피앤비화학은 2013년 5월 어음금 청구 소송을 냈다.

그리고 2015년 10월 금호산업이 워크아웃 직전 금호피앤비화학에 발행한 어음 대금 90억 원과 이자 30억 원 등 120억 원을 갚으면서 금호석유화학 측에서 관련 소송을 취하한 것이다. 

2016년 1월 금호석유화학은 검찰에 “박삼구 회장의 배임혐의를 재수해달라”고 항소했다. 또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의 CP 발행시기에 이미 변제능력을 상실했고 CP를 통한 자금지원 시 위법적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검찰이 제대로 판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금호석유화학은 2015년 6월 박삼구 회장 때문에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고 박삼구 회장을 배임혐의로 고발했다.

이는 금호석유화학이 2009년 12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을 신청했으며 당시 금호석유화학은 이들 회사의 워크아웃 신청 당일과 다음날 계열사 CP를 사들여 거래대금 165억 원을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은 2016년 1월 금호석유화학이 박삼구 회장을 배임형의로 고소고발한 사건을 무혐의 처분했다.

금호석유화학은 박삼구 회장과 기옥 전 금호석유화학 대표를 상대로 “CP거래에 따른 배임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 103억 원을 지급하라”는 민사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2015년 말 박삼구 회장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재건하게 되면서 두 사람 간 갈등의 골이 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삼구 회장은 박찬구과 화해 의지를 드러냈다. 박삼구 회장은 2016년 1월 기자들과 만나 "어차피 나이도 먹었고 (동생과)화해하도록 더 노력하겠다"며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박찬구는 박삼구 회장 체제의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긍정적으로 관계를 재설정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창업주이자 아버지인 박인천 회장의 경영이념을 물려받되 박삼구 회장과 화해는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부터 화해의 가능성에 대해서 “과거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화해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상훈

2000년 3월 철탑산업훈장을 받았고 같은 해 산업재해예방 대통령상을 받았다. 같은 해 환경친화와 안전초일류 기업과 품질경영 우수 50대기업으로 선정됐다.

2005년 11월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2010년 9월 이웃돕기 유공자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2012년 제2회 기후변화 그랜드 리더스 어워드 기업부문에 선정됐다.

2012년 제2회 기후변화 그랜드 리더스 어워드 기업부문을 수상했다. ‘기후변화 그랜드 리더스 어워드’는 기후변화센터가 한 해 동안 기후변화 대응에 앞장선 정부, 기업, 시민사회의 파트너십을 통해 각계의 역량과 지혜를 모으고자 노력하는 개인과 기관들을 대상으로 주는 상으로 2011년 처음 제정됐다.

◆ 어록

“석유화학은 올해로 45년 됐다. 금호가는 70년이지만 우리는 45년이다.” (2016/01/07 기자들이 올해가 금호그룹 창립 70주년인데 같이 할지 묻는 질문에)

“생각해봐야지.” (2016/01/07 기자들이 박삼구 회장과 화해를 묻는 질문에)

“우리가 금호석유화학그룹으로 출범하는 올해는 공교롭게도 금호그룹이 7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70년간 우리는 금호그룹이 있어 태어날 수 있었고 또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금호그룹’이었기에 할 수 없었던 것들도 많았다. 과거 우리를 성장시켰던 것들은 더 이상 미래를 담보하지 못한다.” (2016/01 신년사에서)

“우리는 과감히 옛 방식과 결별해야 한다.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다. 그 길에서 실패를 겪는다 해도 이겨내서 후대에게 물려 줄 정신이나 가치를 남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금호를 계승발전시키는 진정한 유산일 것이다.” (2016/01 신년사에서)

(‘남에게 진실되게 살아라’라는 창업주의 가르침을 언급하며) “반 평생, 40년을 금호인으로 살아온 저로써는 아직도 그 뜻을 다 헤아리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씀이 금호석유화학그룹의 새로운 창업에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2016/01 신년사에서)

“금산공장은 금호석유화학과 상해 일지승이 15년여 동안 쌓아온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합작사의 제2의 도약과 발전을 위해 추진한 프로젝트다. 이번 준공을 통해 금호석유화학이 양국의 경제발전에 더욱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15/10/22 중국 상해시에서 열림 중국 합작사 상해금호일련소료유한공사의 금산 공장 준공식에서)

“세계 최대의 생산능력과 기술력에 안주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발판으로 삼아 한 단계 도약할 것인지는 당연하게 의지해 온 과거의 관례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달렸다.”(2014 신년사에서)

“나는 회사에 지금과 같은 천문학적 손실을 입혔으면 반드시 책임지고 물러났을 것이다. 당신은 무책임한 사람이다.” (2009 이사회 해임 당시)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마당에 형과 소모적 갈등보다 금호석유화학을 잘 이끌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 (2014/02/01 1심 선고 뒤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의 희망은 연구소다." "내일은 연구소가 있어서 더 희망적이다." (2013/12 연구실적보고회)

◆ 평가

박찬구는 ‘통계학’을 전공한 재무전문가 출신답게 수치에 밝고 꼼꼼한 성격이다.

'의사소통’과 ‘의견조율’을 기업의 운명과 비견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해 왔고, 회사이익 창출에도 식견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찬구는 2009년 매출 2조8016억 원, 영업이익 1161억 원에 그쳤던 금호석유화학 실적을 2010년 대표이사 회장으로 복귀하면서 매출 3조8863억 원, 영업이익 3645억 원으로 키웠다.

특히 품질을 강조해 연구개발에 힘쓰고 있다. 박찬구는 대내외 경기침체에 따른 경영위기 속에서도 그룹 차원에서 연구개발에 힘을 실어줬다. 박찬구는 평소 "우리의 희망은 연구소"라고 말하며 시장을 선도할 기술개발을 강조해 왔다.

박찬구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2011년 2월 기자간담회를 개최할 만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간담회에서도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한두 마디만 간단히 한다. 자리를 같이 한 김성채 금호석유 사장 등에게 발언하게 함으로써 배려심이 깊다는 평가도 받았다.

2016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도 참석해 평소의 성품대로 대기업 오너이면서도 책상에서 떨어진 구석에서 조용히 행사를 지켜봤다.

◆ 기타

딸 박주형씨에게 금호석유화학의 지분을 상속해 화제가 됐다. 이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공동경영합의인 ‘남자에게만 상속한다’는 원칙을 깬 것이다.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는 ‘여러 사람이 관여할 경우 분란의 가능성이 있어 상속은 남자에게만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금호그룹은 이를 창업주의 유훈으로 여기며 70년 가까이 이 원칙을 지켜 왔다.

박찬구는 평소 능력이 있으면 딸도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찬구의 2015년 3분기 누적 보수는 20억8700만 원이었다.

취미는 바둑과 골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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