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혁신은 ‘사람’을 중심에 둘 때 가능하다. 애플의 마우스를 디자인하는 등 디자인업계의 맥킨지라 불리는 ‘IDEO(아이데오)’의 켈리 형제나, 스티브 잡스의 ‘영혼의 파트너’라고 알려진 애플의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 모두 마찬가지였다. 형인 데이비드 켈리는 IDEO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실리콘밸리 혁신기업들이 극찬하는 스탠퍼드 디자인스쿨의 석좌교수도 겸임하고 있다. 동생인 톰 캘리는 IDEO를 크게 키운 최고경영자(CEO)다. 그의 경영능력 덕분에 IDEO는 직원 15명에서 60명이 넘는 글로벌기업으로 거듭났다.
회사를 차린 지 10여년 뒤인 1987년 동생 톰이 회사에 합류했다. 톰은 UC버클리대 경영전문대학원(MBA)을 나와 GE 등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는 형 데이비드가 부족했던 경영능력과 순발력이 뛰어났다. 톰은 지금의 IDEO라는 이름을 짓고 직원 각자의 개성을 살려주는 자유분방한 기업문화 분위기도 조성했다. IDEO는 창의적 조직문화로 국내외 기업들에게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IDEA 안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은 임원실이 아닌 주방이다. 톰은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디자인에서 사용자경험(UX)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혁신의 제1원칙이 ‘사람’에 주목하는 접근방식이라고 했다. 톰은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 있어도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톰은 “사람을 잘 관찰하고 아직 그 사람이 깨닫지 못한 욕구를 발굴해낼 때 비로소 혁신이 창출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앞으로 성공할 수 있는 디자인은 결국 사용자의 숨은 욕구를 찾아내는 일임을 뜻한다 ◆ 조나단 아이브, 스티브 잡스의 ‘영혼의 파트너’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엔지니어는 그 디자인에 맞게 만든다.’ 조나단 아이브는 이런 잡스의 디자인 철학을 함께했다. 그래서 잡스의 ‘영혼의 파트너’라고 불린다. 아이브는 회사 내에서 조나단이란 이름보다 ‘조니(Jony)’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잡스는 시도때도 없이 조니를 외치며 애플의 디자인과 경영에 관련한 모든 사항을 물었다.
잡스는 독단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반면 아이브는 내성적이고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아이브는 끈기와 집념이 매우 강했다. 아이브는 상대방에게 디자인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백 개의 모형과 시제품을 만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잡스와 아이브는 디자인과 경영철학이 모두 통했다. 사용자에게 완벽하게 일체되는 디자인을 원했다. 또 디자인 디테일에 광적으로 집착해 둘은 곧 찰떡궁합이 됐다. 잡스는 틈만 나면 아이브를 불렀다. 디자인팀이 아닌 다른 부서 직원들은 차별을 받는다고 느꼈을 정도다. 잡스는 디자인팀에 와서도 아이브와 단둘이서만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심지어 주변의 다른 디자이너들은 잡스와 아이브가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음악 볼륨을 높여줬다. 아이브는 디자인을 할 때 ‘디자인 스토리’를 가장 중시했다. 사용자에게 어떤 경험과 감성을 안겨줄 것인가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그는 평소 “디자인이 보이지 않게 하라”고 역설적인 말을 했다. 사용자도 모르게 디자인이 제품의 본질이 되어 사용자에게 물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즉 애플의 디자인은 애플 제품 그 자체인 셈이다. 잡스는 모든 공정에 디자이너들을 투입했다. 나사못 하나를 쓸 때도 디자이너들의 최고 수장인 아이브와 의논했다. 그 결과 아이브의 손에서 애플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일관된 디자인이 탄생했다.
삼성전자는 애플을 추격하면서 잡스와 아이브가 디자인으로 성공한 것을 지켜봤다. 또 기아자동차가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면서 매출을 끌어올렸던 것도 확인했다. 삼성전자는 2011년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인 크리스 뱅글을 가전제품 디자이너로 들이는 파격적인 계약을 한다. 크리스 뱅글은 17년 동안 BMW에서 디자인 혁신을 일으켰다. 그는 BMW에 들어간 지 10년 뒤 혁명이라고 불릴만한 BMW 7시리즈를 만들어 낸다. 그의 디자인은 기존의 클래식한 디자인과 너무 달라 한 때 BMW 매니아들에게 살인협박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런 뱅글이 돌연 삼성전자 가전 부문에서 제안한 디자인 협력을 받아들였다. 자동차가 아닌 새로운 제품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현재 거액의 몸값에 비해 ‘뱅글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뱅글이 자동차 디자인에 맞춰져 있다 보니 그의 디자인을 짧은 시간에 바꾸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뱅글이 자동차와 완전히 다른 가전제품의 소비자 사용자경험(UX)을 완벽히 이해하고 디자인에 반영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뱅글과 3년 계약이 오는 6월 종료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뱅글과 마스터디자이너 협력관계는 3년으로 마무리 되지만 새로운 협력관계를 이어갈 계획도 갖고 있다”며 “지금까지 디자인분야에 한정했지만 좀더 분야를 넓혀 경영 전반에 걸쳐 협력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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