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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
축구로 이름알린 '현대가문'의 7선 의원
홍지용 기자 hjy1120@businesspost.co.kr | 입력 : 2014-05-15 10:25:58

   
▲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 생애

정몽준은 1951년 10월 부산에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6남으로 태어났다.

197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1982년 현대중공업 사장에 임명된 이후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주주를 유지하고 있다. 1988년 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3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1994년부터 2011년 1월까지 국제축구 연맹(FIFA)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월드컵 유치에 기여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과 후보단일화를 이루었으며, 2007년 한나라당에 입당, 2009년 당 대표를 지냈다. 제19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4년 5월 의원직을 사퇴하고 6.4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새누리당 후보로 나섰으나 박원순 후보에 패배했다.

◆ 가족관계

조부 정봉식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 농민 출신이다. 부친인 정주영은 정봉식의 장남으로 현대그룹의 창업자다.

아래위로 형제가 많다.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구가 둘째 형이며, 현대백화점 그룹 명예회장 정몽근이 셋째 형,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다섯째 형이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정몽윤, 현대기업금융 회장 정몽일이 동생이다.

사촌으로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 및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정몽선 현대시멘트 및 성우그룹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정몽훈 성우전자 회장, 정몽용 성우오트모티브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대표 및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진 KCC그룹 회장 및 정몽익 KCC 그룹 사장 등이 있다.

처가 인맥이 상당하다.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낸 유력 정치인인 김동조의 4녀 김영명과 결혼했다. 처형인 김영숙의 사위가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회장이다.

또 다른 처형인 김영자의 남편은 GS그룹가문의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이다. 허광수 회장의 차녀인 허유정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장남인 방준오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정기선, 정예선) 2녀(정남이, 정선이)를 두었다. 장남 정기선은 동아일보와 보스턴컨설팅 그룹, 크레디트스위스그룹을 거쳐 현재 현대중공업 경영기획팀 상무로 일한다.

늦둥이 정예선의 이름이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예선전 때 태어나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몽준은 최근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의미와 돌림자 ‘선을 합쳐서 지었다고 밝혔다.

◆ 학력

1964년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를 거쳤다. 이후 서울대학교에 경제학과에 진학해 1975년 졸업했다. 육군중위 만기 전역 후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경영대학원에서 1980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근혜 대통령 및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장충초등학교 동창이다. MIT 대학원 동문으로는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현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1993년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문제연구원(SAIS)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외에도 2002년엔 한국체육대학교에서, 2011년엔 전주대학교와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경력

1975년 정몽준은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졸업 후 2년여 간의 군복무기간과 미국 MIT 유학기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현대중공업 상무로 들어온 80년 7월부터 일했다. 1982년 불과 31세의 나이에 현대중공업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한편으로는 1983년 대한양궁협회장, 1984년 실업테니스연맹 회장 등을 지내며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1981년엔 당시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이던 부친 정주영 회장의 올림픽 유치활동을 도왔다. 1985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과정을 밟았다.

1987년 11월 귀국해 중공업 회장을 맡았다. 그뒤 1988년 4월 제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0년 민주자유당(민자당)에 입당했다가, 부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초원복집사건’에서 범인은닉죄를 적용받아 징역 6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선친의 대선 실패 이후 정몽준은 축구에서 활로를 찾았다. 1993년 1월 그는 김우중에 이어 제47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2002년 월드컵 유치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정몽준은 이후 제50대 회장의 임기가 끝나는 2009년 1월까지 4회에 걸쳐 재임했다.

2002년 11월 정몽준은 월드컵 유치 성공을 위하여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선거에 도전하겠다고 표명하였으며, 1994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축구연맹 연차총회 중 실시된 아시아지역 FIFA 부회장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96년 5월 31일 FIFA는 2002년 월드컵을 만장일치로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하는 것으로 확정했고, 12월 30일 정몽준은 2002년 월드컵 한국측 조직위원회 실무부위원장에 선출됐다. 이후 FIFA 부회장 직을 2011년까지 역임했다.

한일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에 힘입은 정몽준은 2002년 9월 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국민통합21을 창당했다. 그러나 대선 후보 등록을 이틀 앞둔 11월 25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 여론조사 경선에서 패했다. 대통령 투표일 하루 전날인 12월 18일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 제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듬해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2위로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2009년 박희태 당 대표가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로 대표직을 내놓자 당 대표직을 승계했다. 하지만 9개월 만인 2010년 6•2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2009년 1월, 2011년 1월 대한축구협회 회장 및 FIFA 부회장 직에서 물러났으며, 지금까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및 FIFA 명예부회장을 맡고 있다.

◆ 사건/사고

1970년 대학교 학부시험 부정행위(커닝)가 적발되어 해당학기 과목 수강 취소 및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정몽준은 1970년 서울대학교 1학년 2학기 ‘문화사’ 교양과목 기말고사에서 타 학우의 답안을 어깨 너머로 훔쳐보다 전임강사 심재기(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에게 적발되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을 1년 더 다녀야 했다. 동아일보 취재진에 “시험을 빨리 끝내고 놀러가겠다는 들뜬 기분에서 저지른 충동적인 일이었다”고 토로했다.

1992년 12월 11일 제14대 대통령선거 직전 발생한 ‘초원복집사건’으로 인해 불구속 기소되었다. 통일국민당 측 도청실무자 3명에게 도피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범인은닉죄를 적용 받았다. 징역 6개월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2008년 4월 2일 당시 사당에서 거리 유세를 마친 정몽준에게 MBC의 김모 기자가 당시 지역구(동작 을)의 논쟁거리였던 사당 뉴타운 사업과 관련하여 질문을 던지자 정몽준은 "다음에 하자"며 왼손으로 김 기자의 오른쪽 뺨을 두 번 건드렸다.

김 기자는 성희롱이라며 항의했고 정몽준은 본인 명의로 사과문을 내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다"며 해명을 했다. 피해자 김 기자가 소속한 MBC 보도국은 해명에 반발하며 "손이 실수로 닿은 것인지 고의로 얼굴을 만졌는지는 당시 촬영된 비디오를 보면 누구든 알 수 있다"면서 사과를 요구했다.

2008년 4월 3일 정몽준은 서울 여의도 MBC 본사를 방문해 김 기자를 만나 '김 기자의 뺨을 건드린'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2008년 6월 27일 KBS1에 방송된 라디오에서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으로부터 "서민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 기본요금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라는 질문에 "요즘은 카드로 타는데 한 번 탈 때 70원 하나요"라고 답했다.

논란이 일자 정몽준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하여 "마을 버스를 이용하며 요금이 7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을 70원으로 착각했다"라고 해명하였다. 이어 "사실 일반버스 요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며 "서민 물가를 알아보기 위해 재래시장에서 일부러 물건도 사보고 하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뒤 일주일 후에 열린 7월 3일 제10회 한나라당 전당 대회에서 정몽준은 "한나라당 동지들은 따뜻했고 너그러웠다. 이 작은 선물이 그 증거"라며, 당원들에게 선물받았다는 버스 요금 지불용 전자카드인 노란색 티머니 카드를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정몽준이 보여준 카드는 ‘학생용 티머니 카드’여서 비난이 식을 줄 몰랐다. '여전히 서민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거 같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2011년 10월 2일 한겨레는 정몽준이 2011년 9월 6일 발간한 자서전 《나의 도전 나의 열정》을 자신의 회사인 현대중공업 직원들을 동원하여 사재기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몽준이 자서전 판매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그룹과 재단 쪽 임직원에게 문화상품권을 대량으로 나눠주고 책을 사오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중공업 그룹의 한 관계자는 직원들이 사재기 의심을 피하는 요령을 교육받고, 책과 영수증을 도로 회사에 반납했으며, 정몽준 의원이 저자 사인회에도 동원됐다고 밝혔다.

2014년 4월 18일, 세월호 침몰 사고로 온 국민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정몽준의 막내아들 정예선이 페이스북에 올린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정예선은 사고 이틀 후인 4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대통령에 소리 지르고 욕하고 국무총리에 물세례.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라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해 비난여론이 일자 정몽준 의원은 4월 2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라고 말했다.

정몽준이 아들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사과한지 약 한달여 만인 5월 11일, 한 인터넷언론에서 정몽준의 부인 김영명이 서울의 한 당협 사무실에서 했던 말이 알려져 논란이 재점화됐다. 김영명은 한 인터넷언론의 동영상에서 “"막내가 일을 저지른 거 아시죠? 그 아이가 지금 지난번 대학가는 거 실패하고, 재수생이다. '바른소리 했다'고 격려해주시고 위로해주시긴 하는데, 시기가 안 좋았고, 어린아이다 보니까 말 선택이 좀 안 좋았던 것 같다"라고 발언했다.

정몽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 아내가 앞에서 사과하고, 뒤에서 딴 말을 하는 이중 얼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다시 한 번 사죄드린다"고 글을 남겼다.

◆ 상훈

2002년 한일월드컵 유공자 자격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정몽준은 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월드컵의 성공 개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9년 세계 축구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말레이시아 다투 작위를 받았다. ‘다투’는 말레이시아 내국인 가운데 국가 발전에 공헌을 한 이에게 주어지는 작위다. 정몽준은 외국인으로서 주앙 아벨란제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및 조셉 블래터 현 FIFA 회장에 이어 세 번째로 작위를 받았다.

2010년 남미축구연맹(CONMEBOL)에서 최고 훈장을 받았다.

◆ 어록

“시험을 빨리 끝내고 놀러가겠다는 들뜬 기분에서 저지른 충동적인 일이었다.” (1970년 1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 커닝 부정행위로 적발된 것에 대해)

“그런 식으로 일하려면 모두 집에 가.” (1984년 울산 현대중공업 작업장에서 근무시간에 낮잠을 즐기는 직원을 훈계하며, 일렬로 세워놓고 ‘군기가 빠졌다’고 호통을 쳤다.)

"관중들은 축구협회 직원이 아니고, 자기 돈 내고 들어온 사람들한테 태극기를 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2002년 9월 남북축구경기에서 박근혜가 “관중들이 한반도기를 들기로 했는데 왜 태극기를 들었느냐”, 또 경기 전 붉은 악마가 ‘대한민국’을 외치자 “왜 ‘통일조국’을 외치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항의하자 - 자신의 자서전 《나의 도전 나의 열정》

"요즘은 카드로 타는데 한 번 탈 때 70원 하나요?" (2008/6/27 KBS1 라디오 한나라당 당권주자 생방송 토론에서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이 "서민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 기본요금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라고 묻자)

“건강한 국가를 위해 여야가 행정부를 견제해야 한다”,“그게 무슨 궤변이야”, “날짜를 정한 게 언제야”, “왜 총선 법정선거 운동 기간에 끼워넣은 거야, 그게 상식에 맞아?”, “선거기간에 G20 하는게 말이 돼?”, “어떻게 선거기간에 하겠다는 거야. 행사하는게 자랑이 아니야”, “미국이 만약 중요한 선거가 있다면 그랬겠어.”

“(김성환) 장관 같은 사람이 장관을 하니까 외교부가 문제없이 잘되는지….” “거친 표현으로 결례를 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2011/9/20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여당(한나라당) 소속이었음에도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반말조로 질타한 후 사과까지)

"탈모되는 분들에게 필요한 건 발모제예요. 그런데 발모제는 꼭 머리가 없는 사람들만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그건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2014/3/5 MBN '뉴스공감'에 출연해 "재벌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서민정책을 펼칠 수 없을 것"이라는 시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핵주먹 타이슨이 권투경기 중 상대편 귀를 물어뜯어 쫓겨났다.” (2014/4/1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앞두고 김황식 전 총리 캠프의 네거티브 공세를 비판하며)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짓에 아버지로서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저희 아이도 반성하고 근신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2014/4/21 아들 정예선의 세월호 관련 발언 논란이 격해지자 국회 정론관에서 발표한 사과문)

“제 아내를 만나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앞에서 사과하고 뒤에서 딴말하는 이중얼굴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2014/5/11 아들 정예선의 발언에 대한 부인 김영명의 발언이 다시 파문을 낳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과문에서)

"내가 서울시장 후보가 되면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야 하는데 지역구(서울 동작구)를 부인에게 공천하도록 하겠다." (2014/5/11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측근 및 캠프 인사 10여 명과 점심을 함께하면서)

◆ 평가

정 의원의 학생시절 별명은 ‘꺼벙이’다. 큰 키(182cm)에 소탈하고, 겸손하지만 우유부단하다는 뜻이다.

순전히 그의 공으로 보아야하는지 논란이 있으나 ‘2002월드컵 개최 및 4강 신화’의 달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년 앞서 월드컵 유치에 나선 일본을 상대로 현대그룹 조직까지 동원해 총력전을 펼쳤다. 또한 1994년 불리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FIFA 아시아담당 부회장에 당선돼 월드컵 유치의 발판을 마련했다.

축구계 일부에서 그의 인사기용을 ‘측근 중심의 리더십’으로 언급했다. 대한축구협회 내 현대계열사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정몽준이 회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축구협회 남광우 사무총장은 현대중공업 총무부장, 유영철 홍보국장은 현대자동차 출신이었다. 가삼현 국제국장은 현대중공업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했고 김동대 사무총장보도 현대건설 출신이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도 정몽준의 사촌이다.

이와 관련해 현대중공업의 한 퇴직자는 “리더십 스타일은 아버지를 빼닮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원들 일부는 부하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그의 스타일을 놓고 “대통령 되려고 마음먹었으면 직원들에게 잘해줬어야지…”라고 불만을 표시한다.

정몽준의 현대중공업 활동기간 중 중공업의 사업구조가 탄탄한 체질로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권오갑 상무는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으로 조선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불황에 허덕일 때 당시 정 사장은 시추선에 진출하는 등 조선 선종을 다양화하고 로봇 철탑 건설장비까지 업무영역을 넓혀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반면 노조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1989년 1월 8일 발생한 현대그룹 계열사 노동자 연쇄테러 사건에 그가 개입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 의원은 “그 당시 노조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며 "일부는 명예훼손으로 대법원까지 판결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정치인 정몽준의 평판은 극과 극이다. 정몽준 의원의 한 보좌관은 “성격이 급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며 그의 성급함을 지적했다. 정몽준은 이에 대해 “지금까지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리적이고 매너가 좋다는 평도 있다. 다른 전직 비서관은 “직원들이 떠나는 차에 인사를 하면 왜 차에다 대고 절을 하느냐며 하지 말라고 말린다. 또 비서를 시키지 않고 직접 자신이 동료 의원에게 전화를 한다”고 말했다.

◆ 기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대에 진학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쁜 나머지 울산으로 변형윤, 이현재 교수 등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을 초청해 크게 한턱을 냈다. 정 명예회장은 “우리 몽준이가 혹시 사무착오로 합격한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면서 우리 아들을 잘 지도해 달라고 수차례 부탁했다고 한다.

정치인과 재벌의 병역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정몽준 자신은 1975년 학군(ROTC) 13기 소위로 임관해 1977년 중위 만기 전역했다. 장남 정기선 역시 학군 43기로 병역의무를 이행했다.

‘애처가’로 유명하다. 정몽준은 1978년 미국 MIT대 유학 중 넷째 형수 이행자의 소개로 김영명씨를 만나 1년여 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 자랑이 유별나서 ‘김영명이 없으면 오늘의 정몽준도 없다’는 우스갯말이 떠돌 정도다. 스스로도 살면서 가장 잘 한 일로 결혼을 꼽았다.

7선 의원이다.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과 함께 현역 최다선 의원이다. 1988년 제13대 총선부터 2004년 17대 총선까지 울산 동구에서 당선되었다. 무소속이거나 혹은 부친이, 또 본인 스스로 창당한 정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2008년 제 18대 총선부터 서울 동작구 을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힘들 때 의논 상대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다. 이홍구는 정주영 일가와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으며,  정주영 명예회장 10주기 추모위원장, 아산정책연구원의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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