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쟁당국이 약 1년 만에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승인했지만 중국 고객사에 공급하는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물량과 가격 조정, 중국 반도체기업 지원 등을 사실상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서버용 SSD 등 낸드플래시사업 확장에 중요한 기회를 맞게 됐지만 중장기적으로 중국시장 의존도를 낮춰야만 하는 과제를 재확인하게 됐다.
 
중국 SK하이닉스 인수합병 조건부 허용, 이석희 중국 의존 낮추기 확인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로이터는 23일 “중국 당국이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승인했지만 조건이 붙었다”며 “인수합병이 이뤄진 뒤 SSD 시장 경쟁을 제한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결과”라고 보도했다.

중국 당국은 SK하이닉스가 지난해 90억 달러에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결정한 뒤 독점방지 규제에 따라 승인을 받아야 하는 8개 국가 경쟁당국 가운데 유일하게 조건부로 승인을 내렸다.

지난해 12월부터 다양한 이유를 들어 인수합병 승인을 계속 늦춰오던 중국정부가 여전히 SK하이닉스를 견제하는 동시에 자국 반도체산업 육성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경쟁당국이 내놓은 조건에는 SK하이닉스가 중국에 판매하는 서버용 SSD 제품 가격을 최근 2년 평균보다 높일 수 없지만 앞으로 5년 동안 공급 물량은 꾸준히 늘려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다른 반도체기업과 담합해 가격 또는 물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거나 특정 고객사에 독점적으로 반도체를 공급해 공정한 경쟁질서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 뒤 중국 'PCIe 및 SATA'규격 서버용 SSD시장에서 55% 안팎의 점유율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 조사기관 트렌드포커스에 따르면 PCIe 및 SATA 규격 제품은 올해 2분기 글로벌 전체 서버용 SSD 출하량에서 90%가량을 차지했다.

중국은 SK하이닉스 반도체사업에서 미국 다음으로 비중이 큰 시장이기 때문에 중국정부에서 SSD 공급 가격과 물량을 통제하는 것은 SK하이닉스 실적 증가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수 년 동안 메타버스와 인공지능 등 신산업 발전에 따라 낸드플래시 및 SSD 가격이 급등해도 SK하이닉스가 중국 고객사에는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판매해야하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경쟁사의 서버용 SSD 시장 진출을 도와야 한다는 짧은 조건이 가장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 당국에서 SK하이닉스가 어느 기업을 어떤 방식으로 도와야 하는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정부에서 이를 핑계로 삼아 SK하이닉스를 압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정부가 YMTC 등 현지 반도체기업의 서버용 SSD 시장 진출을 위해 SK하이닉스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줘야 한다고 요청한다면 SK하이닉스가 이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공산이 크다.

결국 이석희 사장이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 확정으로 중요한 기회를 맞게 됐지만 중장기적으로 반도체사업에서 중국 의존을 낮추는 과제도 안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사장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에 큰 기대를 걸고 최근 정기 조직개편에서 글로벌사업을 담당할 사업총괄조직과 미국사업을 책임질 미주사업조직을 신설해 인력을 강화했다.

SK하이닉스가 인수합병을 통해 인텔의 기존 낸드플래시 및 SSD 글로벌 고객사를 대거 확보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선제적으로 변화를 추진한 셈이다.

이 사장은 수익성이 높은 서버용 SSD 시장 진출을 확대해 그동안 SK하이닉스 전체 영업이익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하거나 적자를 봤던 낸드플래시사업을 새 성장동력으로 키우려 하고 있다.

하지만 SK하이닉스가 낸드플래시 생산과 판매를 중국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장이 중국정부의 압박이 커질 가능성에 대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최근 중국 경쟁당국의 반도체 관련된 인수 심사 트렌드는 조건부 승인 또는 불허"라며 "이번에 포함된 조건들은 기존 심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도와달라는 것은 시장경제 논리대로 낸드플래시 공급을 원활히 해 달라는 조건"이라며 "공정거래나 시장 경쟁체제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일반적인 조건"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중국이 중장기적으로 자국 반도체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한 자급체제 구축을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SK하이닉스를 이런 목표에 활용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정부도 중국의 이런 태도를 경계해 SK하이닉스의 중국 반도체공장 투자 등을 압박하고 있는 만큼 이 사장이 SK하이닉스의 중국 의존 낮추기에 더 속도를 내야만 하는 시점이다.

SK하이닉스는 그동안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 때문에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승인받지 못할 가능성을 고려해 반도체 시설 투자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수에 필요한 절차가 대부분 마무리된 만큼 이 사장이 중국 이외 지역에 SK하이닉스 낸드플래시 생산공장 증설을 확대해 생산처를 다변화하는 전략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가 확정된 만큼 SK하이닉스가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SSD 고객사 확대를 추진하는 데도 불확실성이 걷혀 더욱 공격적으로 영업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사장은 최근 조직개편 및 임원인사에서 직접 미주사업장을 맡아 미국 대형 IT고객사 대상 영업을 총괄하고 책임지기로 했다.

다만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중국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SK하이닉스 반도체 주력시장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