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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서정훈 기자 seojh85@businesspost.co.kr 2015-12-22 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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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은 1915년 11월1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정봉식과 한성실의 6남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뒤 통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정식으로 학교를 다닌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다.

어린 시절 부모처럼 가난한 농부가 되기 싫어 4번이나 가출했다. 마지막 가출 때 인천항만 공사장과 풍전엿공장(동양제과),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건물 공사장에서 막노동으로 연명했다.

23살 점원으로 있던 복흥상회라는 쌀가게를 인수해 가게 이름을 ‘경일상회’로 고치고 사업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1939년 중일전쟁이 치열해져 전시 쌀 배급제가 실시되자 경일상회를 폐업한 뒤 평소 알고 지내던 차량정비기사 이을학씨의 권유로 서울 아현동에 있던 ‘아도서비스’(Art Service)라는 차량정비소를 인수했다.

해방 뒤 국내에 진주한 미군에게 적산토지를 불하받아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웠다. 1947년 ‘현대토건’도 설립했다. 두 회사는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다.

6.25전쟁 동안 미8군이 발주한 토목공사의 수주를 거의 독점하며 부를 쌓았다. 당시 미군 통역장교이던 동생 정인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6.25전쟁이 끝난 뒤 건설경기 붐을 타고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이에 힘입어 1967년 현대자동차, 1971년 현대중공업이 설립되는 등 현대그룹은 한국의 대표적 재벌로 성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직을 13대부터 17대까지 연속으로 맡는 등 재계의 거목으로 자리잡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첫 하계올림픽 유치에도 힘을 보태 대한체육회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그룹 회장에서 물러나며 경영일선에서 손을 놨다. 그 뒤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정주영은 ‘국민당’을 창당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한 뒤 정치계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정주영이 선거유세를 본격화하면서 내놓은 책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국내 대기업 총수 가운데 처음으로 방북하고 소떼를 몰고 북한을 찾는 등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애썼다. 분단 뒤 처음으로 금강산 뱃길이 열린 것도 정주영의 공으로 손꼽힌다.

현대그룹은 재계 1위로 승승장구를 달렸지만 IMF사태의 여파를 피하지 못 했다. 정주영은 이 과정에서 현대전자 등 부실 계열사가 타 기업에 매각되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정주영은 말년에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차남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정몽헌 현대그룹 전 회장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왕자의 난’을 교통정리 하는 등 기업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았다.

2001년 3월21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정주영은 ‘한강의 기적’의 중심에 섰던 경영인이자 한국 최고의 재벌답지 않은 검소함과 근면함, 성실함 등으로 국민에게 큰 사랑을 받은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정주영은 불굴의 의지로 가난과 낮은 학력 등의 콤플렉스를 모두 이겨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출할 때 마다 “이놈아, 너처럼 일자무식에 시골 촌놈이 서울에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이야.”라며 현실을 직시시켰지만 정주영은 결국 현실의 벽을 노력으로 넘어섰다.

청년시절부터 배짱 하나만큼은 두둑했다. 나룻배를 탈 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배에 올라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한 뒤 배 주인에게 뺨을 맞아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아도서비스라는 차량정비소를 인수했으나 개업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화재로 공장이 전소됐다. 직원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었으나 정주영은 “어차피 사업도 안 되서 접을려고 했어. 철거비 아낀거지. 자! 남은 돈으로 막걸리 파티나 하자고!” 라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인천항 공사장에서 막일하던 시절 ‘빈대’에게 끈기를 배운 일화를 자신의 자서전에서 소상히 밝힌 적이 있다.

매일 들끓는 빈대 때문에 식탁 위에서 잠을 잤더니 빈대가 식탁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봤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식탁다리를 물을 담은 그릇에 담궜는데 그래도 몸이 가려워 확인해보니 빈대가 그를 물기 위해 천장에 올라가 점프를 하더라는 것이다.

정주영은 기업인에게 ‘신용’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복흥상회에서 일한지 3년 만에 쌀가게를 인수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재계 1위인 현대그룹 총수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직원들과 부대껴 어울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이나 현대건설이 매년 실시하는 신입사원 연수회에 참가해 직원과 막걸리 파티를 여는 것을 잊지 않았고 직원 체육대회 때는 회장의 체면도 마다한 채 모자를 뒤로 눌러쓰고 씨름대회에 앞장서기도 했다.

정주영은 기업인이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보다 먼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현대자동차가 엔진을 자체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일본의 미쓰비씨자동차 경영진이 막대한 지원책을 약속하며 사업을 포기하라고 종용할 때도 정주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알파엔진’이다. 현대자동차는 1991년 출시한 스포츠세단 모델인 ‘스쿠푸’부터 자체개발한 알파엔진을 장착했다. 자동차기업이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하려면 엔진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은 필수다.

소양강댐 공사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도쿄대학을 나온 일본인 기술자들이 소양강댐을 철근콘크리트 공법에 기초해 지어야 한다며 공사는 일본에서 맡겠다고 한국 정부를 종용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럴 경우 공사경비가 많이 든다는 점과 유사시 철근콘크리트 댐은 적군에게 피격돼 파괴될 가능성이 크다며 소양강댐 건설을 일본에게 맡기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는 대신 더 값싸고 안전한 방식을 찾으라고 우리 기술진에게 요구했고 소양강 댐에 철근콘크리트 대신 완만한 자갈을 깔자는 대안을 찾아냈다.

정주영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유치에 실패하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계 총수들을 총집합해 IOC총회가 열리는 서독의 바덴바덴으로 찾아가 IOC위원들을 일일이 만나는 '각개격파' 전법으로 서울이 결국 유치권을 따오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당시 서울과 맞붙었던 일본의 나고야는 개최지로 선정될 것을 확신해 IOC위원들에게 명품 시계 등을 선물하는 선에서 형식적인 유치작전을 폈다.

하지만 정주영은 한복을 차려입은 대한항공 승무원들을 대동하고 위원들을 모두 만나며 매일 득표상황을 점검하는 열의를 보였다.

IOC위원 아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일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생화와 엽서를 보내자는 것도 정주영의 아이디어였다.

정주영은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없더라도 번뜩이는 재치를 앞세워 전문가보다 더 문제를 잘 해결한 적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3년 아산만 방조제 공사 당시 이른바 ‘정주영 공법’을 도입해 난공사를 마무리 지은 것이다.

정주영은 당시 유속이 너무 빨라 쌓아놓은 토사가 바닷물에 유실되자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폐선박을 끌어와 물길을 아예 틀어막고 공사를 진행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많은 기술진이 이를 반대 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이거봐, 해보긴 해봤어?" 라며 실제 폐선박을 가져와 난공사 구간에 인위로 가라앉혔고 물살을 막아 공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정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았을 당시 공기를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굳는 속도가 빠른 조강시멘트를 단양 공장에서 직접 공수해오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빠듯한 예산 속에서 실시됐기 때문에 시멘트가 얼마나 빨리 굳는가에 따라 비용이 크게 달라졌다.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공사’를 진행할 때도 정주영의 기지가 빛을 발했다.

정주영은 현지에서 대형 구조물을 직접 건조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구조물을 한국에서 건조할 경우 한국의 일감도 늘어난다는 점을 간파해 울산에서 구조물을 건조한 뒤 바지선으로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까지 나르도록 지시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부산 UN군 묘지를 방문하러 미군 수뇌부가 현장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난 뒤에는 보리밭을 현금으로 매입해 당시 막 싹이 트던 보리를 현장에 옮겨심어 마치 푸른 잔디가 난 것처럼 보이게 해 미군의 신임을 얻은 적도 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가 위치했던 울산에서 정주영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울산에 별도로 설치된 분향소를 찾은 수 많은 시민이 그의 죽음을 눈물로 애도했다.

정주영은 울산에 대규모 공장을 지으면서 직원들이 살 수 있는 사택을 제공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또 유치원을 비롯해 중학교(2개), 고등학교(3개), 전문대학(1개), 종합대학(1개) 등을 지어 교육사업에도 큰 공을 세웠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지금도 근로자의 자녀들에게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전액 지원하는 등 교육사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울산 유일의 대학병원인 울산대학병원을 비롯해 5성급 호텔인 현대호텔, 현대예술회관, 한마음회관, 미포복지회관, 문화회관 등의 여가시설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울산시민의 편의를 위해 지은 것이다.

정주영은 울산 동구주민이 시내로 수월하게 나갈 수 있도록 현대자동차 공장 인근에 ‘아산로’를 지어 울산시에 기부하기도 했다.

정주영은 노태우정부 시절 북방외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이력도 있다. 한국과 소련이 정식 수교를 맺기 직전 정주영은 소련을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정주영은 국내 기업인 가운데 남북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주영은 1989년 그룹 핵심 수뇌부를 대거 이끌고 남한 경제인 가운데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소떼를 몰고 직접 북한을 찾아 전세계적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 분단이후 남한사회가 겪었던 굵직굵직한 사건이나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정주영도 이 영화에 나온다는 점은 그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46년 미군에게 불하받은 적산토지에 현대자동차공업을 세웠다. 1947년에는 사업을 확장해 ‘현대토건’도 설립했다.

1950년 현대건설을 설립해 사장에 올랐다. 현대건설은 설립 당시만 하더라도 직원 100명이 채 안 되는 중소기업이었지만 미8군 공병대의 장비 상당수를 불하받은 데다 영어에 능했던 동생 정인영의 활약으로 미군의 발주공사를 따내면서 승승가도를 달렸다.

1964년 충청북도 단양에 현대시멘트 공장을 세워 ‘호랑이표 시멘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5년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을 수주받아 현대건설이 해외로 진출하는 초석을 다졌다.

1967년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만 일대에 현대자동차를 세웠다. 현대자동차는 설립 초기만 하더라도 기술력이 없어 일본 미쓰비씨자동차에 의존하는 형국이었지만 현재는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1971년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 현대시멘트 등을 총괄해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1973년 울산광역시 동구 미포만 일대에 현대조선중공업(현대중공업)을 설립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13대~17대)을 역임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제27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1987년 현대그룹 회장을 내려놓고 그해 12월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1992년 국민당을 창당해 총재에 올랐다. 그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12월 치러진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3년 국민당을 해체하고 국회의원 직도 1년 만에 사퇴했다. 그 뒤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았다.

1994년 한국지역사회교육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올랐다.

1998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1998년 타임이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에 올랐다.

◆ 학력

1922년 통천소학교에 입학해 1930년 졸업했다.

청소년 시절 가출한 뒤 서울에서 인텔리로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부기와 변호사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서강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경희대학교 충남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조지워싱턴대학교,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기업가로 성공한 뒤 ‘사학법인 현대학원’을 세워 양질의 교육 시스템을 제공하는데 힘썼다. 현대학원은 유치원부터 4년제 종합대학까지 모든 학교를 보유하고 있다.

◆ 가족관계
23살에 변중석과 결혼했다.

고 정인영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 고 정순영 전 현대시멘트 고문, 고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상영 KCC명예회장이 정주영의 남동생이다.

아들로 고 정몽필 전 인천제철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고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회장, 정몽준 전 국회의원,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을 뒀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과 정기선 현대중공업 전무, 정대선 현대비에쓰앤씨 사장 등이 그의 손자다.

정성이 이노션 고문과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 정윤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 등이 그의 손녀다.

◆ 상훈

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데 이어 1982년 자이레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주는 국가훈장을 받았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대상을 수상했고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같은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주는 올림픽 훈장도 수상했다.

1998년 노르웨이 왕실이 주는 최고수준의 공로훈장인 ‘커맨더위드스타’를 수상했다.

2001년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을 수상했다.

사후인 2008년 제4회 DMZ(비무장지대) 평화상 대상을 받았다.

◆ 상훈

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데 이어 1982년 자이레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주는 국가훈장을 받았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대상을 수상했고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같은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주는 올림픽 훈장도 수상했다.

1998년 노르웨이 왕실이 주는 최고수준의 공로훈장인 ‘커맨더위드스타’를 수상했다.

2001년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을 수상했다.

사후인 2008년 제4회 DMZ(비무장지대) 평화상 대상을 받았다.

어록


“이제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 (1998년 6월, 소떼 500마리를 몰고 군사분계선을 넘기 전 소감을 밝히며)


“150살까지 살고 싶다.” (1997년 MBC 교양프로그램 성공시대에 출연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991년 출간된 자서전 제목)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1992년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선거 포스터에 적힌 문구)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할 땐 결코 돈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1991년)

“기업은 이익이 우선이긴 하지만 국가에 도움이 되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1985년)

“부의 근원은 근검이다.”(1984년)

“이거봐, 해보긴 해 봤어?”(1983년 아산만 방조제 공사당시 난공사 구간이던 곳을 폐선박으로 물길을 막고 흙을 쌓는게 어떻겠냐는 자신의 의견을 직원이 안 된다며 난색을 표하자)

“가장 큰 자산은 신용이다. 공신력을 갖고 있어야만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1983년)

“뉴스는 신문으로 보면 되는데 라디오는 왜 필요하느냐?” (1970년대 직원 기숙사를 방문해 아껴 쓰고 열심히 모으라며)

“우리 어깨 위에 민족의 생사가 달려 있고 그래서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 (1976년)

“각하,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1975년 석유파동직후 중동을 다녀온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 한국기업의 중동진출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며)

"우리는 당신들보다 훨씬 앞서 철갑으로 된 배를 만들어 운용했던 경험이 있다."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애플도어에서 현대중공업을 짓는데 필요한 차관을 지원해줄 수 없다고 하자 설득시키기 위해)

“사진에 찍힌 여기에다 조선소를 지어 당신네 배를 만들어 줄테니 돈은 미리 주시오.” (1971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의 조카에게 배를 수주하기 위해 아직 건설시작도 안 한 조선소 부지 사진을 보여주며)

◆ 평가

정주영은 불굴의 의지로 가난과 낮은 학력 등의 콤플렉스를 모두 이겨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출할 때 마다 “이놈아, 너처럼 일자무식에 시골 촌놈이 서울에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이야.”라며 현실을 직시시켰지만 정주영은 결국 현실의 벽을 노력으로 넘어섰다.

청년시절부터 배짱 하나만큼은 두둑했다. 나룻배를 탈 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배에 올라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한 뒤 배 주인에게 뺨을 맞아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아도서비스라는 차량정비소를 인수했으나 개업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화재로 공장이 전소됐다. 직원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었으나 정주영은 “어차피 사업도 안 되서 접을려고 했어. 철거비 아낀거지. 자! 남은 돈으로 막걸리 파티나 하자고!” 라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인천항 공사장에서 막일하던 시절 ‘빈대’에게 끈기를 배운 일화를 자신의 자서전에서 소상히 밝힌 적이 있다.

매일 들끓는 빈대 때문에 식탁 위에서 잠을 잤더니 빈대가 식탁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봤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식탁다리를 물을 담은 그릇에 담궜는데 그래도 몸이 가려워 확인해보니 빈대가 그를 물기 위해 천장에 올라가 점프를 하더라는 것이다.

정주영은 기업인에게 ‘신용’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복흥상회에서 일한지 3년 만에 쌀가게를 인수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재계 1위인 현대그룹 총수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직원들과 부대껴 어울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이나 현대건설이 매년 실시하는 신입사원 연수회에 참가해 직원과 막걸리 파티를 여는 것을 잊지 않았고 직원 체육대회 때는 회장의 체면도 마다한 채 모자를 뒤로 눌러쓰고 씨름대회에 앞장서기도 했다.

정주영은 기업인이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보다 먼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현대자동차가 엔진을 자체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일본의 미쓰비씨자동차 경영진이 막대한 지원책을 약속하며 사업을 포기하라고 종용할 때도 정주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알파엔진’이다. 현대자동차는 1991년 출시한 스포츠세단 모델인 ‘스쿠푸’부터 자체개발한 알파엔진을 장착했다. 자동차기업이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하려면 엔진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은 필수다.

소양강댐 공사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도쿄대학을 나온 일본인 기술자들이 소양강댐을 철근콘크리트 공법에 기초해 지어야 한다며 공사는 일본에서 맡겠다고 한국 정부를 종용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럴 경우 공사경비가 많이 든다는 점과 유사시 철근콘크리트 댐은 적군에게 피격돼 파괴될 가능성이 크다며 소양강댐 건설을 일본에게 맡기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는 대신 더 값싸고 안전한 방식을 찾으라고 우리 기술진에게 요구했고 소양강 댐에 철근콘크리트 대신 완만한 자갈을 깔자는 대안을 찾아냈다.

정주영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유치에 실패하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계 총수들을 총집합해 IOC총회가 열리는 서독의 바덴바덴으로 찾아가 IOC위원들을 일일이 만나는 '각개격파' 전법으로 서울이 결국 유치권을 따오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당시 서울과 맞붙었던 일본의 나고야는 개최지로 선정될 것을 확신해 IOC위원들에게 명품 시계 등을 선물하는 선에서 형식적인 유치작전을 폈다.

하지만 정주영은 한복을 차려입은 대한항공 승무원들을 대동하고 위원들을 모두 만나며 매일 득표상황을 점검하는 열의를 보였다.

IOC위원 아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일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생화와 엽서를 보내자는 것도 정주영의 아이디어였다.

정주영은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없더라도 번뜩이는 재치를 앞세워 전문가보다 더 문제를 잘 해결한 적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3년 아산만 방조제 공사 당시 이른바 ‘정주영 공법’을 도입해 난공사를 마무리 지은 것이다.

정주영은 당시 유속이 너무 빨라 쌓아놓은 토사가 바닷물에 유실되자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폐선박을 끌어와 물길을 아예 틀어막고 공사를 진행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많은 기술진이 이를 반대 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이거봐, 해보긴 해봤어?" 라며 실제 폐선박을 가져와 난공사 구간에 인위로 가라앉혔고 물살을 막아 공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정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았을 당시 공기를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굳는 속도가 빠른 조강시멘트를 단양 공장에서 직접 공수해오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빠듯한 예산 속에서 실시됐기 때문에 시멘트가 얼마나 빨리 굳는가에 따라 비용이 크게 달라졌다.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공사’를 진행할 때도 정주영의 기지가 빛을 발했다.

정주영은 현지에서 대형 구조물을 직접 건조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구조물을 한국에서 건조할 경우 한국의 일감도 늘어난다는 점을 간파해 울산에서 구조물을 건조한 뒤 바지선으로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까지 나르도록 지시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부산 UN군 묘지를 방문하러 미군 수뇌부가 현장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난 뒤에는 보리밭을 현금으로 매입해 당시 막 싹이 트던 보리를 현장에 옮겨심어 마치 푸른 잔디가 난 것처럼 보이게 해 미군의 신임을 얻은 적도 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가 위치했던 울산에서 정주영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울산에 별도로 설치된 분향소를 찾은 수 많은 시민이 그의 죽음을 눈물로 애도했다.

정주영은 울산에 대규모 공장을 지으면서 직원들이 살 수 있는 사택을 제공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또 유치원을 비롯해 중학교(2개), 고등학교(3개), 전문대학(1개), 종합대학(1개) 등을 지어 교육사업에도 큰 공을 세웠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지금도 근로자의 자녀들에게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전액 지원하는 등 교육사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울산 유일의 대학병원인 울산대학병원을 비롯해 5성급 호텔인 현대호텔, 현대예술회관, 한마음회관, 미포복지회관, 문화회관 등의 여가시설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울산시민의 편의를 위해 지은 것이다.

정주영은 울산 동구주민이 시내로 수월하게 나갈 수 있도록 현대자동차 공장 인근에 ‘아산로’를 지어 울산시에 기부하기도 했다.

정주영은 노태우정부 시절 북방외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이력도 있다. 한국과 소련이 정식 수교를 맺기 직전 정주영은 소련을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정주영은 국내 기업인 가운데 남북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주영은 1989년 그룹 핵심 수뇌부를 대거 이끌고 남한 경제인 가운데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소떼를 몰고 직접 북한을 찾아 전세계적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 분단이후 남한사회가 겪었던 굵직굵직한 사건이나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정주영도 이 영화에 나온다는 점은 그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기타

정주영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방에는 낡은 금성(Goldstar) 텔레비전 한 대와 작은 옷장, 기운 흔적이 역력한 양말, 뒷굽을 갈아 끼운 구두 등이 전부였다. 그는 생전 술과 담배도 멀리 했다.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북한을 찾은 데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17살 때 부친이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서울로 가출한 경험이 있는데 남한에서 기업인으로 성공해 이제 고향에 그 빚을 갚겠다는 것이다.

정주영의 소떼방북은 전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CNN 등 외신은 정주영이 방북하는 장면을 생중계 했고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정주영의 행위를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표현했다.

정주영은 소떼방북에 앞서 특별히 임신한 암소를 많이 포함시킬 것을 지시했다.

정주영은 처음 방북했던 1989년 북한의 도청이 두려워 일부러 호텔로비 근처를 조깅하며 그룹 수뇌부와 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정주영은 한국 체육계에 큰 공헌을 한 것과 달리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현대그룹이 1996년에야 뒤늦게 프로야구에 뛰어든 것도 정주영이 애초 야구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구와 씨름만은 예외였는데 농구의 경우 수행원 한 둘만 데리고 장충체육관을 찾아 대학농구 대회를 직접 보는 것이 TV 중계화면에 나올 정도로 열성팬이었다.

정주영이 고려대학교 농구부의 대학농구 49연승을 이끈 이충희 선수를 놓고 “무조건 잡아오라”고 하는 등 신인선수 선발에 관여했던 것은 지금도 농구계의 공공연한 사실이다.

정주영은 씨름이 힘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운동이라 여겼고 본인도 씨름을 무척 즐겼다.

그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덩치 큰 선수를 잇따라 무너뜨리는 이만기 선수에게 매료돼 그에게 프로야구 A급 선수에 준하는 연봉을 안겨주며 현대코끼리씨름단으로 데려왔다.

정주영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한국경제 속에서도 중심부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정주영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정주영은 매일같이 경부고속도로 공사장과 서울 사무실을 왕복하며 잠을 거의 자지 못 하다 청와대로 불려간 적이 있는데 대통령의 코앞에서 몇 분간 졸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정주영은 박 대통령의 불호령을 예상했지만 대통령은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며 “임자, 내 임자에게 많이 미안하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에 감명받은 정주영은 현장을 다시 찾은 뒤 “여기에서는 당신들이 왕”이라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가 중심이 돼 공사가 진행되도록 강조했다.

정주영은 술이 약했는데 가끔 청와대 만찬에 불려나가 고생도 많이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청와대 담벼락에다 술 먹고 구토한 사람은 나 말고 없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주영은 젊은 시절 소설가인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읽고 주인공인 허숭처럼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

정주영은 재계인사 모임 등에 참석하며 간간히 골프를 치기는 했지만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주영은 MBC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의 팬이었다. 배우 최불암씨와 개인적으로 친해 전원일기에 까메오로 출연할 뻔한 적도 있다. 다만 당시 스케줄 문제로 정주영의 드라마 출연은 무산됐다.

최불암씨는 2005년 방영된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정주영을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인 세기그룹 천태산 회장의 역을 맡기도 했다.

정주영은 재계 총수 가운데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사이가 가까웠다. 두 사람 모두 어린시절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했고 자수성가로 대기업을 키워낸 공통점이 있어 친해질 수 있었다.

정주영의 별명은 '왕(王)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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